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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님, 평균수명은 46세
조선 임금님, 평균수명은 46세
  • 의사신문
  • 승인 2019.03.1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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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66〉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당뇨병과 관절통에 늘 시달렸다고 한다. 세종은 서른 살 무렵부터 소갈(消渴, 당뇨병 같이 목이 쉬이 말라 물이 자주 켜이는 증세)이 심해 물을 한 동이[양옆에 손잡이가 달린 둥글고 아가리가 넓은 질그릇의 한 가지로 물 긷는데 쓰임] 씩 마실 정도로 당뇨병이 심했다. 세종 재위 이십일 년째인 1439년 6월 21일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10여 년 동안 몹시 아파오다가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이 생겨 아프기 시작한지 오래다. 통증이 심할 때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고통을 참을 수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정에서 목욕하고자 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신들이 백성에게 폐가 미친다고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가 있어 온정에서 목욕을 했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이 있은지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나았다. 지난 해 여름 임질을 앓아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약간 나았다. 지난 봄 무예 행사를 주관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프더니 안막[각막을 가리킴, 필자 주]을 가리게 되었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져 한 걸음 사이를 두고도 잘 안 보인다. 무리하게 무예행사를 주관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니 나이 늙어 쇠약해짐이 심하다.”

세종의 나이 서른여덟 살 때 기록이다. 세종은 제대로 당뇨병 조절이 안 된 상태로 끊임없이 염증이 발병하고 안과 합병증으로 시력장애 등도 겹쳐 대단히 힘들어 했다. 더구나 업무 또한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지나치게 무거웠다. 세종의 하루를 적어 본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6시 무렵에 근정전에서 열리는 대조회[초하루와 보름에 아침 일찍 문무백관이 정전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정사를 아뢰어 임금의 결재를 받던 큰 조회]에 참석했으며, 이어 8시에 곧바로 사정전으로 가서 윤대[매월 세 번씩 각 부서의 실무보고를 받는 일]를 행한 뒤 집현전 학사 및 승지 등과 함께 유학의 경서를 공부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으로 오전 업무를 마쳤다. 또 오후 3시부터는 각종 상소문을 살펴보면서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논의했으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8시부터는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한 모든 책의 교정을 직접 봤다.'

이와 같이 종일 국무에 매달리다 보니 따로 운동할 틈새가 없었다. 이러한 업무 과다에다가 육식을 유난히 좋아했던 세종의 식사습관은 비만을 불러왔을 것이다. 뒤이어 앞서 이른 당뇨병과 관절질병을 초래하였다. 더 안타까운 일은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무식이었다. 조절이 안 된 당뇨병과 합병증, 그리고 과도한 업무에 지친 세종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세자에게 나랏일을 위임하고자 신하들에게 알리고 논의를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 뜻을 접고 그대로 정사를 다스리다가 쉰 살이 다 되어가는 1445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건강 상태가 되어서야 세자에게 정무를 넘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당뇨병은 이미 상당히 악화된 지경이었다. 결국 쉰 세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이 46.1세이니 상대적으로 짧은 편은 아니다. 서울의대 의사학 교실 황상익 교수의 추측에 따르면 조선시대 서민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혹은 그 이하였을 것이라고 하니 그나마 의식주 생활이 비교적 궁핍하지 않고 의료혜택도 가장 많이 받았던 덕에 비교적 넉넉히 수명을 누린 폭이다.

여러 병에 시달린 세종과 비교하여 자주 이야기되는 같은 조선조 왕이 영조다. 82세를 살았으니 단연 오래 살았다. 영조는 소박한 일상을 즐겼다고 한다. 비단 보다는 명주로 만든 이불과 요를 썼고 움직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쉰 살의 영조를 `영조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이 무명으로 된 잠옷을 입고 소자모를 썼으며, 명주로 만든 이불 하나 요 하나가 전부였으며, 병풍과 장막도 치지 않았다. 또 기완[보고 즐기기 위하여 모든 기구나 골동품 같은 것]도 변변치 않았다. 임금의 검소한 덕에 찬탄하지 않는 신하가 없었다.”

영조는 밥과 김치, 약간의 장류만으로 차려진 밥상을 즐겼다. 밥도 보리밥을 좋아해서 나물을 섞어 비벼먹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술은 당연히 마시지 않았다. 또한 영조는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궁궐 밖 잠행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많이 걸었을 것이다. 자동으로 활동 운동을 많이 한 셈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에 보태어 영조는 다른 왕들과 달리 건강 점검을 열심히 했다. 조선시대에 왕은 닷새마다 한 번씩 건강상태를 점검받게끔 되어 있었는데, 영조는 이삼일에 한 번 자진하여 검진을 받았다고 한다. 

왕의 장수에 대한 염원도 어느 평민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상급의 의식주와 의료 혜택이 장수 염원에 보탬을 줄 수는 있지만 직위가 수명을 반드시 늘려 주지는 않는다. 더러 양질의 의식주와 의료서비스로 평민에 비해 얼마간 좋은 건강을 누리게 하여 수명에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지만, 동시에 과중한 업무와 나라의 일을 감당해야 할 심한 스트레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반대로 낮추어 버린다. 건강과 질병은 함께 존재하고 함께 살아간다. 어느 한쪽만 존재하여 살아갈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관계와 다름없다. 건강과 질병엔 직위가 없다. 건강과 질병 그리고 수명의 본질은 만인에게 평범할 뿐이다. 혹여 차이가 날지라도 그것은 평범한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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