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 가요? “남성 No.1”? 
풍자 가요? “남성 No.1”? 
  • 의사신문
  • 승인 2019.02.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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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03〉 

 유학을 하고 영어를 하고 
 박사 호 붙어야만 남자인가요?
 나라에 충성하고 정의에 살고 
 친구 간 의리 있고 인정 베풀고?
 남에겐 친절하고 겸손을 하고
 이러한 남자래야 남성 넘버원

 

1957년 반야월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곡을 만들어 박경원이 노래한 인기 가요 `남성 넘버원'의 일 절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미국 문물이 우리사회에 막강한 위력을 보이는 시대의 유행가이다. 당시 사회 모습을 꼬집은 풍자적 가사에 경쾌한 멜로디를 붙여 큰 인기를 끌었다. 한 조사에서는 `1960년대 최고의 인기 가요 200편' 중 135위로 평가되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히트한 이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어렵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대부분의 유행가와 달라서 어린 나에게도 특이한 노래로 기억되어 있다. 60년이 지난 오늘에야 가사를 살펴보고 다시 음미해 본다.

첫 줄의 `유학'이란 미국 유학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영어를 하고'라는 가사가 이어서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줄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후 미국은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부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대와 1960년 대에 물질 원조도 많이 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유학생을 받아 문화와 과학을 전수했다. 장기적 안목으로 인재 양성을 장려한 것이다.

한 예로 1955년∼1961년까지 미국 국제협력본부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특히 서울대학교에 인적자원 교육을 집중하였다. 공과대학, 의과대학, 농과대학의 교수 요원 226명이 미네소타 대학에 연수를 하여 우리 선진 기술과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의과대학의 경우, 대다수인 77명의 교수가 각 세부 분야에 걸쳐 1-2년씩 첨단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미국 유학생들은 배우고 익힌 미국식 이념이나 사상, 형이하학적 물질과 도구를 당연히 최선으로 여기고 조국에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본식(대부분은 유럽을 모방한) 문물을 대치하였다. 의학의 경우, 일본이 추종하던 독일 의학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를 미국 의학이 차지하였다. 미국은 동경의 땅이고 꿈속에서라도 가고 싶은 천국이었다.

가사의 3∼5줄은 나라 충성, 사회 정의, 친구 믿음, 겸손 같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열거하고 있다. 이런 유교적 가치가 더 좋다고 점잖 하게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 문물에 밀린다는 현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1∼2줄은 나에게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사자성어를 떠오르게 한다. 세상의 중심인 미국에 가서 공부하여 박사라는 비단옷으로 단장하고 고향이 있는 대한민국으로 돌아 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 박사는 조선 왕조의 과거시험 급제와 동격이었다. 영어로 쓰여진 졸업장은 한자로 된 홍패(급제 자에게 주는 성적, 등급과 이름이 기록된 붉은 증서)와 같아 명예와 함께 지위, 재물이 보장되었다. 당연히 사무실 벽에 금빛테두리로 장식해 걸어 놓았다.

이차 세계대전 후 Pax Americana를 구현한 미국과 상대하는 데에 영어에 능통한 미국 유학파, 미국 박사가 당연히 유리했고, 이런 친미파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엘리트로 떠올랐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기성세대는 벼슬자리, 남성 넘버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이런 나의 가설(?)은 나중에 나오는 3절 가사 1∼2 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학을 나와 벼슬을 하고
공명을 떨쳐야만 대장부인가
부모님 효도하고 공경을 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 위하고
귀여운 자녀교육 걱정을 하는
이러한 남녀래야 한국 남녀요

종래의 가치관을 권장하는 내용처럼 보이나 역설적으로 새로운 대장부인 `미국 유학 박사'를 부러워하고 있다. `벼슬'과 `공명'은 그들의 차지이다. 여러분은 화목한 가정의 소시민으로 만족하라는 의미이다. 기가 막힌 풍자요, 변명이요, 한탄이다. 어떻게 보면 `No. 1'이 못되는 자기를, 아니 우리들을 변명하고 위로하는 가요 인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핵심은 이 노래에서 권장한 유교에 바탕을 둔 우리 생각과 생활 태도가 지난 60년 동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서양 철학이 지향하는 개인적 합리주의, 공익을 위한 법치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변형되어 있다. 정신적 아이덴티티와 자존심이 없으면 힘있는 국가에 휘둘릴 것이 자명하다. 요즘 미국과 북한의 정상 회담에서 한국이 제외되고 있는 사태도 이와 연관 있지 않을까? 나에게 스스로 물어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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