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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거울에게 묻다
늙음, 거울에게 묻다
  • 의사신문
  • 승인 2019.02.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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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62〉

유형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조선의 이옥은 `화석자문초(花石子文쿘)'에 실린 `경문(鏡文)'에서 다음과 같이 거울에게 묻는다.

“아! 나는 7, 8세부터 이미 너에게서 내 얼굴을 보았고, 지금까지 또 40여년이 흘렀으니 내 나이도 50에서 하나가 부족한 것이다. 정신은 졸아들고 안색은 말라가며, 살은 쇠락하고 피부는 주름지며, 눈썹은 희게 세고 안력은 흐릿하며, 입술은 거뭇하고 이빨은 엉성해짐이 또한 진실로 기약된 것이기는 하나, 내 나이를 견주어보면 요즘 더욱 사치스럽고 영화로워진 자가 간혹 많이 있기도 한데, 어찐 오직 나에게만 늙음이 빨리 온단 말인가?” - 김미영 등, `노년의 풍경'

그러자 거울이 매몰차고 건조하게 답한다.

“그대의 어린 시절에는 기생이 던진 꽃들이 다발을 이루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거리의 구경꾼이 나귀를 막아섰으며, 겨우 삼십을 넘어서는 비록 구면이 아닌데도 과거 합격자의 반열에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진실로 오래 머물러 주는 것이 아니며, 명예란 진실로 오랫동안 할 수 없는 것이니, 일찍 쇠락하여 변하는 것이 진실로 정해진 이치다. 그대 어찌 절절히 그것을 의심하며, 또 어찌 우울히 그것을 슬퍼한단 말인가? 그대가 만약 묻고 싶다면 조물주에게 물어보게나.”

설마 거울이 답을 했으랴. 거울 앞에선 이옥이 생각을 했겠지. 억울해하지 않고, 늙음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지금의 내 모습이 이제까지 삶의 현실적 결과이며 흔적임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정해진 이치로서의 늙음을 알면서도 확인하려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아침에 눈 뜨면서 제일 먼저 하는 행동 중의 하나는 거울보기다. 정확히 이르면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동작을 한다. 세상은 거울로 점점 가득 차고 있다. 작은 손거울에서 초고층 빌딩 전체를 온통 감싼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거울, 그리고 은밀하고 세미한 행위와 말썽까지 찍고 때론 자진하여 드러내는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과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라 불리는 거울들. 그러나 크기와 기능에 상관없이 거울이 반사하는 모양은 순전한 그대로가 아니다.

`거울의 역사'에서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이렇게 주장한다. “반사상은 언제나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욕망에 가려 단 한 번도 완벽하지 못하다.”욕망은 파스칼이 말한 삶의 질서인 육체의 질서, 마음의 질서, 사람 사이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자신의 반사상에 지나치게 몰입된 사람은 무질서한 덫에 걸린다. “백설 공주가 가장 아름다워요”라는 거울의 말에 분노가 터쳐 사과에 독을 넣고,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모든 욕망을 잃고 자기 가슴에 칼을 꽂기도 한다. 나아가 생각, 지식과 진리, 메시지와 빅데이터, 가치관 등의 질서 체계가 뒤죽박죽 흐트러져 사회가 탈이 나고 국가가 고장이 난다.

거울은 정체성 탐구의 일상용품이다. 개인의 거울은 개인을, 사회의 거울은 사회의 그 정체성을 돌아보는 생활일상용품이다. 일상생활용품의 존재 목적은 삶의 평탄과 풍요에 있다. 나를 돌아보고 사회 형편을 둘러보아 웃자란 돌출은 누그러뜨리고, 덜 자란 잔망스러움엔 무게를 보태어 주고, 턱없이 묻은 패설(悖說)은 정성껏 닦아내는 일을 보조하는 게 거울의 존재이유다. 그래서 보네는 `거울은 꿈과 현실의 매개로 기능하다'면서 `거울의 이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거울은 거울일 뿐이다. 거울은 변하지 않는다. 광물로 만든 거울은 있는 그대로 형상을 반사한다. 거울은 자기 확인과 자기 표상의 무덤덤한 보조품일 뿐이다. 이처럼 광물성인 거울의 광학적 현상은 거울에 모습을 비추는 스스로의 해석과 수용에 의해 미추(美醜)로 갈린다. 따지고 보면 좌우를 바꿔 놓고, 안팎을 뒤집어 놓고, 주체를 객체로 만드는 광학적 결과는 낯섦뿐이다. `거울 앞의 나'와 `거울에 비친 자기'가 같은지 다른지, 욕망이 솟구칠지 희생적 이타가 흘러넘칠지를 가르는 일은 전적으로 거울 앞에 선 실재의 몫이다. 그 몫을 감당하는 실재의 정체성이 반듯해야 마주선 실재와 반사상이 서로 지탱하여 삶을 제대로 튼실하게 한다.

이옥이 거울에게 하는 질문조 한탄을 다시 한 번 빌려온다.

“아,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너에게서 얻어 보니, 곧 네가 내 얼굴을 얼굴로 보여주는 것이다. 네가 얼굴로 보여주는 것이 다름이 있음을 네 어찌 모른단 말이냐? 나는 모르겠노라. 네가 보여준 얼굴이 그 옛날 가을 물처럼 가볍고 밝던 것이 어이하여 마른 나무처럼 축 처져 있으며, 그 예날 연꽃이 물들 듯 노을이 빛나듯 하던 것이 어이하여 돌이끼의 푸른 빛이 되었으며, 그 옛날 구슬처럼 빛나고 거울처럼 반짝이던 것이 어이하여 안개가 해를 가린 듯 빛을 잃었으며, 그 옛날 다림질하던 비단 같고 볕에 말린 능라 같던 것이 어이하여 늙은 귤의 씨방처럼 되었으며, 그 옛날 부드럽고 풍만하던 것은 어이하여 죽어서 쓰러진 누에의 죽은 것과 같이 되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나의 늙음을 거울에게 물어 보고 있다. 그래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변화를 비추어 보는 게 눈 닫고 의심하기보단 정해진 이치에 훨씬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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