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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걸음
노인의 걸음
  • 의사신문
  • 승인 2019.01.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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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60〉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한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오천 칠백 오십 오보를 걷는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연구팀이 세계 111개국 성인 남녀의 스마트폰 보행 기록을 바탕으로 조사하여 과학 잡지 네이처에 발표한 결과다. 첫 걸음마를 뗀 생후 일 년 남짓부터 여태까지, 더구나 삼십년 가까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있으니 걸음엔 이력이 날만도 한다. 이제는 휙휙 날아다니지는 못해도 쌩쌩 다닐 수 있어야 될 법도 하지만, 노인 반열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보폭도 속도도 조심스러워진다. 더구나 두 다리를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없어 짚을 수 있거나 잡을 수 있는 장치는 일단 짚고 잡는다. 특히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거나 산을 내려올 경우엔 주변에 의지할 만한 만물을 찾아 잡느라고 두 다리보다 두 팔이 더 바쁠 지경이다. 덩달아 목적지까지의 소요 시간도 더 여유롭게 늘려 잡고 출발한다.

걸음은 보기보다 간단치 않은 동작이다. 두 발을 번갈아 떼어 옮기는 몸놀림이지만 두 발뿐 아니라 온몸의 근육과 뼈, 신경, 혈관 등이 서로 대단히 복잡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행위다. 몸 뿐 아니다. 모든 게 잘 마련되어 있어도 걸어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억지 걸음은 도무지 성에 차지가 않는다. 학자들은 본디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두 다리로 직립생활을 하게 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익혀 온 것이 현재의 두 다리 걸음이라고 한다. 다윈의 견해에 따르면 `영장류 중의 어떤 종류는 먹을 것을 찾는 방법을 알거나 또는 출생한 토지의 조건이 편한 까닭에 나무 위 생활을 하지 않고 땅위에서만 생활하게 되자 아마 전진하는 방법이 변하였을 것이다.' 그의 주장 속에는 `아직 두 다리 걸음은 진화 중'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 기어 다니게끔 태어난 네 발 가운데 두 발은 두 손이 되어 도구를 쓰면서 지구를 지배하고 있지만, 두 다리가 된 두 발은 튼튼한 직립의 전진 방법을 익혀 가고 있는 도중이다.

이처럼 간단하지도 또한 온전하지도 않아 아직은 불완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동원하여 세심하게 움직여야 제대로 작동하는 걸음은 건강 상태에 따라 변한다. 대표적으로 파킨슨 병 환자는 걸음이 느려지고 보폭이 좁아져 종종걸음으로 발을 끌기도 한다. 건강상태에 의한 걸음걸이의 변화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늙음이다. 여러 변화 중에서 특히 속도가 느려진다. 그래서 노인에선 보행 속도를 측정하는 것만으로도 요양병원 입원율을 짐작할 수 있고 사망률도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아산병원 이은주 교수팀은 보행속도가 느린 노인은 정상 속도인 노인에 비해 1.5배 더 자주 입원하고 사망률은 2.5배 증가한다고 보고한 바 있다.

오늘도 걷는다. 기왕 걷는 바에야 건강하게 걸으려고 다리 근육을 비롯한 온몸의 조화를 위해 매일 새벽 눈뜨자마자 맨손체조로 마디마디를 풀어주고, 더러 산에도 오르내리며 다리 근육의 질과 양을 좋게 하고, 하루 한 번 이상 밖에 나가고, 알맞게 골고루 제때에 먹어 몸의 영양도 다듬질한다. 햇볕을 하루에 30분씩 쬐어 근육과 뼈를 튼튼히 하는 비타민D 합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쌓여가는 세월이 허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의 걸음이란 생각이 들어 주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국의 주희가 바라본 `노인의 걸음'을 떠올린다.

휴림좌석노인행(休林坐石老人行)  숲에서 쉬고 돌에 앉아 쉬다가 가는 노인의 걸음은
삼십리위일일정(三十里爲一日程)  겨우 삼십 리가 하루 길이라
약장일월능천리(若將一月能千里)  만일 한 달을 가면 천리를 갈 수 있으니
이노인행계후생(以老人行戒後生)  노인의 걸음으로써 뒤에 학문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첫째 구와 넷째 구에 `노인행(老人行)'을 거듭 넣어 노인 걸음을 강조하고 있다. 제목이 `권학(勸學)' 이어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노인의 걸음처럼 쌓아가는 학문의 자세를 권하는 시로 주로 알려져 있다. 부연하면, 느릿느릿 가는 노인은 하루에 겨우 삼십 리를 굼뜨게 걸어가지만 한 달 동안 꾸준히 걸어가면 천리를 갈 수 있으니 이 이치를 잘 알아서 꾸준히 배우고 익히는 일에 힘쓰라는 본보기로 노인행(老人行)을 제시하고 있다. 공자 이후 학문의 제일인자답게 자연스런 세월의 축적이 빠른 것에 놀라면서도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늙음이 드러내는 무늬를 돌이켜 살펴 찾아낸 쓸모 있는 이치를 자신의 학문과 인격 형성은 물론 후학들에게 표본으로 `노인 걸음'을 자랑스레 드러내 보이는 대학자의 품격을 접할 수 있다.

출근길 전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대학자의 이치에 힘입어 노인의 걸음은 꼿꼿이 두 발을 앞세운 몸으로만 해내는 작동이 아니라 노인이 노인답게 내딛어 걸어가는 `노인행'임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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