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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논문 쓰기
즐겁게 논문 쓰기
  • 의사신문
  • 승인 2018.12.2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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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00〉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대학교나 연구소에서 학술 논문 출판이 큰 관심사이다. 개인이나 단체의 연구 역량을 평가하는데 논문이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교수나 연구원을 채용하고 승진시킬 때 공평하고 손쉬운 심사 척도로 쓰인다. 한편, 국제적으로 대학이나 국가간 과학 수준을 비교할 때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SCI 학술지에 실린 우리나라 과학 논문이 59,628편으로 전세계의 3.6%, 국가 별로는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약 2000편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발표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지금은 논문의 수 뿐만 아니라 질적 수준도 객관화하고 있다. 전산 장비의 발전으로 어떤 논문을 잡지나 책에서 인용한 모든 자료가 있어 이 피인용 횟수로 잡지와 논문의 수준을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논문의 평균 피인용 횟수는 5.59이다. 나도 우리 실험실의 꾸준한 노력으로 300여 편의 눈문을 SCI 학술지에 발표했고, 지금까지 13,000번 이상 인용되었다.

이런 논문의 양적 질적 평가는 연구과제 심사에서도 긴요하게 쓰인다.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는 의학 분야 연구비의 가장 큰 공급처이다. 해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0조 원을 2500기관에 나누어 준다. 우리나라 정부의 1년 예산이 450조 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이다. 예전에는 과제를 선정할 때 발표자와 심사위원이 숙박하면서 집중 심사를 했으나, 지금은 과거 논문 업적에도 중점을 둔다는 소식이다. 이 두 심사 방법 간에 결과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제화의 추세에 맞추어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대부분 원고를 영어로 작성한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말자! “영어 실력이 낮아도 영어 논문은 잘 쓸 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고 내 자신이 그 예이다. 영어를 잘 못해도 자연과학 논문은 일정한 규칙이 있어 수학 공식을 유도하는 것처럼 영어로 작성할 수가 있다. 나는 이 쪽에 관심이 있어 책도 읽어보고, 미국 NIH 연구원 시절 한 학기 동안 강좌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확실한 개념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한분자생물학회 주관으로 샌프란시스코 대학 전문가를 초청하여 1주간 집중 강좌를 들은 후였다.

이 분의 강의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우선 가장 기초가 되는 적절한 영어 단어(word)를 선택하는 법, 그 다음에는 문장(sentence)을 만드는 법과 단락(paragraph)을 작성하는 법을 순서대로 가르쳤다. 몇 문장을 모아 단락을 구성할 때도 원칙이 있고, 각 단락 사이에 연결이 되어야 한다.

논문 작성의 최대 원칙은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는 것이다.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초 작업이나 문단을 엮어 실제 논문을 작성할 때 항상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이런 이유로 과학 논문은 문학 작품이나 다른 글에서 볼 수 없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예를 들면 중심단어(keyword)를 반복 사용해야 한다. 오히려 어떤 중심단어가 너무 반복된다고 멋이 있게 다른 동의어를 사용하면 독자는 읽다 말고, 다른 실험이나 결과가 있는지 논문을 다시 살펴 보아야 한다. 또 유용한 도움말로 대칭적 문구를 잘 사용해야 한다. 의생명논문은 조건을 변화하면서 얻은 자료를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두 상황을 기술하는 문장 구조가 같으면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단락에는 주제 문장과 보조 문장이 있다. 그 단락의 핵심 내용을 주제 문장에서 말하고, 보조 문장에서 주제 문장을 설명한다. 주제 문장은 보통 단락 초기에 나오고 각 단락의 주제 문장을 연결하면 이야기 흐름이 맞아야 한다. 이 바탕 하에 논문의 서론, 대상과 방법, 결과, 고안을 작성한다. 다시 강조하면 과학 논문은 소설, 수필이 아닌 수학 문서같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작성하는 일종의 영어 보고서인 셈이다.

학술 논문은 자료의 나열이 아니라, 이 자료에서 얻은 가설을 논리화 한 것이다. 제목과 초록은 독자가 이 논문을 읽을 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하다. 발표자 논리가 흥미를 끌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 서론은 독자에게 사전 지식을 제공하고 왜 이 연구가 필요한지를 기술한다. 방법과 결과는 짝을 이루어 조리 있게 배열한다. 고안은 이 연구의 가치와 활용도를 설득한다. 모든 내용의 표현이 앞서 말한 기준을 따라야 한다.

글쓰기도 반복하면 익숙해져 점차 쉽고 즐겁기까지 하다. 일정한 시간에 쓰면 습관이 되어 새로운 소재도 생각할 수 있고 더 많은 논문을 생산하게 된다. 내 경우는 비교적 일이 적은 겨울방학 동안 논문을 많이 만들었다. 바깥 날씨가 추워 온 세상이 쾅쾅 얼어붙어 조용할 때 쇼팽의 피아노 곡을 방안에 틀어 놓고 원고를 쓴다. 단순 명쾌하게 글을 만들고 논리 전개를 생각하며 전체 구도에 맞추어 간다. 가능하면 쉽게 독자가 이해하고 읽기 좋게. 세상 모든 일이 멈춘 것 같은 시절에 생산적인 정신 활동을 하니 유쾌한 느낌 마저 생긴다.

지금은 영어 교정을 전담하는 국내 회사가 있으나 내 교수 생활 초창기에는 미국 대학의 PhD 한 명을 개인적으로 소개받아 교정하였다.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어 모든 절차가 우편으로 이루어 졌다. 학술지 편집위원장에게 항공우편으로 논문을 제출하고 검토를 받고, 원고를 다시 고쳐 보내고, 마침내 수락 편지를 받는데 까지 수 개월이 걸렸다. 설혹 떨어지더라도 희망을 갖자! 심사자의 지적에 따라 고친 논문은 더 좋아졌으니 그 다음 수준의 학술지에는 실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술지에 깨끗하게 인쇄된 내 이름을 보는 희열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또, 내 논문의 인용 횟수가 높아지는 것도 자부심을 갖게 한다. 공자님은 〈논어〉의 첫 장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라고 학문의 즐거움을 소개하셨다. 여기서 `벗'이란 친구가 아닌 명성을 듣고 배우고자 찾아온 사람을 뜻한다. 책이 귀하고 통신 수단이 미미하던 옛날에는 현자나 학자를 직접 찾아가 공부를 하였다. 결국 공자님 말씀은 자신의 논리와 학설을 다른 사람이 인정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내 생각과 같아 지금이라면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내 논문이 학술지에 발간되어 피인용 수가 늘어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論增加引用 不亦樂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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