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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국수
남양국수
  • 의사신문
  • 승인 2018.12.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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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58〉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라는 뜻을 말하거나 글로 쓰지 않고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많다. 그 중에서 동식물의 특성을 살려 장수기원을 전하는 상징화는 대단히 흥미롭다.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십장생에 들어가는 식물은 소나무, 불로초 등 두 가지다. 여기에 속하지 않지만 장수를 나타내는 식물들이 있는데 복숭아, 장미꽃 등이다.

장미꽃은 한자말로 월계화(月季花), 장춘화(長春花)라 한다. 월계화는 장미과의 상록 활엽 관목으로 5월에서 가을까지 붉은 색 계통 꽃이 매달 연이어 피어 사계화(四季花)로도 불리듯이, 또한 오래도록 청춘이라는 장춘화라 불리듯이 장미꽃은 `늙지 않음'을 가리킨다. 맨드라미와 비슷하고 식용으로도 쓰이는 색비름도 `늙지 않음'을 가리키는데 한자로 안래홍(雁來紅)이기 때문이다. 한자 뜻 그대로 기러기 오는 늦가을까지 붉은 꽃이 쉬지않고 피는 까닭에 장수의 상징 식물 반열에 든다.

이처럼 이름 덕을 본 식물들과 달리 삼천갑자 동방삭이 훔쳐 먹고 장수했다는 일화가 깃들어 있는 천도 복숭아도 있다. 동방삭의 복숭아 이야기는 그 콘텐츠가 너무 과장이 심해 금세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비해 국화에 얽힌 장수 스토리는 상대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다.

“남양의 국화로 빚은 술을 마시면 생명이 살아나는 약으로 칠백세가 되어도 전연 늙어 보이지 않는다.” 중국 당나라 초기 편찬된 `예문유취(藝文類聚)', `풍속통(風俗通)'에 나오는 이야기다. 14세기 초 일본의 `태평기(太平記) 제13권·용마진주사(龍馬進奏事)'에 실려 있는 노래인 `국자동(菊慈童)'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주나라 목왕의 총애를 받던 자동이 실수로 왕의 베개를 넘고 말았다. 원래는 사형이 되어야 하나, 여현산에 유배를 당하였다. 이 산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에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목왕은 그런 곳에 자동을 보내기를 대단히 불쌍히 여겨, 법화경 중 여덟 구의 게(偈) 중 두 구를 살짝 전수 해 주며 “매일 이 어구를 소리내어 말해라”고 일러준다. 자동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그 두 구를 잊지 않으려고 옆에 있는 국화 잎에 두 구를 새겨놓았다. 곧 이 잎에 내린 이슬이 영험한 영수(靈水)가 되어, 그 이슬을 마시고 칠백 세까지 살 수 있었다. (중국엔 이러한 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각색 됨) 또한 일본 무로마치 시대(14∼16세기)에 지어진 `한음집(閑吟集)187'에 따르면, “국수(菊水)는 중국 하남성 내향현에 있는 백하(白河)의 지류다. 옛 이름은 국수(鞠水)로 좀 다른 한자를 쓴다. 이 강 절벽에 있는 국화의 이슬이 강물로 떨어져 물이 달콤하고 물가에 사는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고 한다.”

이러한 간접적 전설보다 좀더 실제 증례 기록이라 평가할 만한 기록이 있다. 몸소 겪은 체험을 핍진(逼眞)하게 읊는 것으로 유명하고 국내에도 번역본이 있는 중국 남송의 대문호 육유(陸游)가 어느 날 병이 들었다. 그는 국화주를 마시고 병이 치유되자 그 체험을 질병 기록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국득상내영(菊得霜乃榮), 유여범초수(惟與凡草殊). 아병득강건(我病得康健), 매각동자부(每却童子扶). 기여국동성(豈與菊同性), 고능노불고(故能老不枯)” (국화는 서리를 맞음으로 영광을 얻고, 다른 평범한 꽃들보다 뛰어나구나. 나의 병이 국화 덕택에 나아서 건강해져 동자의 부축을 항상 거절하니 어찌 나를 항상 부축해 주는 동자가 국화와 같은 성질의 약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기를 잃지 않고 초췌하지 않은 모습으로 늙어가는 구나!”)

신선으로 여겨지던 팽조는 아침마다 국화 이슬을 마셔 무병장수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이 외에도 국화주를 마시고 장수했다는 많은 설화들이 혼합되어 국화주를 연명주(延命酒) 또는 불로장생주(不老長生酒)라 한다. 우리나라에도 국화 장수 이야기는 여럭 전해지고 있다. `양화소록'에 국화는 고려 충숙왕 때 중국에서 전해져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전래와 동시에 국화의 상징성, 일화 등이 함께 건너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황국(黃菊)은 영험한 약용 식물로서 달여 마시면 장수한다고 믿어 왔고, 환갑과 진갑 등 장수를 기리는 잔치를 벌일 때 종종 헌화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고려가요 《동동》의 9월령에 `예로부터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대목이 들어 있어 국화 장수 상징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중양절은 음력 9월9일로 이날 국화를 감상하거나 국화잎을 따다가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기도 했다고 한다.

활짝 피던 방창(方暢)이 없는 이가 있을까. 이슬만 닿아도 수명이 길어지는 불로장생 남양국수를 흘려내던 국화도 시들면 늦가을이고 겨울이 된다. 화창하던 시절의 기준으로 헤아릴 일이 아니다. 어차피 되돌아 갈 순 없는 순리이니 늙음은 그에 걸맞는 측량으로 재고 달아야 한다. 꽃지고 꽃대도 무너지고 가지와 뿌리만 남으면 그 남은 걸 재고 달아서 크기와 무게를 살피면 된다.

중국의 소동파가 아끼는 친구가 있었다. 돈만 생기면 몽땅 책을 사서 읽는 친구 유경문에게 보낸 시 속의 한 구절이다.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에 굴하지 않는 가지가 있다(국잔유유오상지 菊殘猶有傲霜枝)'(`동파전집 권 18' 〈증유경문(贈劉景文)〉에서). 덜렁 남아도 가지답게 서리를 맞으면 그 가지는 남양국수의 그 국화가 맞다. 그래서 국화의 다른 이름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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