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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노인과 사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사자
  • 의사신문
  • 승인 2018.12.1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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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56〉 
유형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연구실에서 옮겨온 짐을 정리하다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영문판(`The old man and the sea', Scribner paperback, 1980)을 발견하였다. 오래 전 읽고 책장 한 귀퉁이에 놓아두었던 것을 손에 드니 반가운 낯설음을 느낀다. 넉넉한 여백에 백 이십여 쪽의 중편을 인쇄한 국판보다 더 작은 크기의 책 표지엔 거센 파도 한 가운데로 솟아오른 주둥이가 길고 뾰족한 커다란 청새치와 작은 배위에 위태롭게 선 노인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총 천연색 그림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처음 영문판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영어 사전 없이 읽을 수 있네'라고 혼잣말을 했던 생각이 떠오를 만큼 문장 역시 변함없이 간결하고 명징하다.

대부분 잘 알고 있듯이 소설은 노인 어부의 바다낚시 이야기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멕시코 만 바다에서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를 낚는다. 작은 배에 청새치를 달고 돌아오는 길에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온다. 노인은 혼신을 다해 상어를 쫓아 버리고 항구로 간신히 돌아온다. 그러나 남은 것은 머리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의 잔해뿐이었다. 긴 투쟁의 낚시 여정에 지쳐 곤한 잠을 자며 노인은 사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꿈속의 사자는 젊을 적 아프리카 해변에서 보았던 사자다. 사자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은 소설의 앞 부분에서부터 나타난다. 산티아고는 소년들에게 이야기한다.

“내가 너의 나이였을 때 나는 아프리카로 달려간 정사각형 배를 타고 돛대 앞에 있었고 저녁에는 해변에서 사자를 보았지.”
소설이 전개되며 사자는 몇 번 더 등장한다. 특히 다음에 나름대로 번역해 인용한 몇 대목은 노인의 사자 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더 이상 폭풍이나 여성, 큰 사건, 큰 물고기, 싸움, 힘겨루기, 또는 아내의 꿈을 꾸지 않았다. 그는 지금과 해변에 있는 사자들의 꿈만 꾸었다. 사자들은 해질녘에 어린 고양이처럼 뛰었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자들을 사랑했다.'
`나는 그가 잠들고 나도 잠들어 사자를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자는 왜 남겨졌을까?'

근데, 왜 헤밍웨이는 사자에 집요할 정도로 초점을 두고 소설을 지었을까? 소설 속에서 노인은 사자 꿈을 세 번 꾼다. 첫 번째 꿈은 사흘간의 낚시 여행 직전, 두 번째는 청새치와의 싸움에서 낮잠을 자면서, 그리고 세 번째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다. 세 번 모두 새로운 힘이 필요하기 직전이다. 앙상한 남은 뼈 앞에서 절망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고 낡고 허름한 침대로 상징되는 고단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념과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 쫓던 사자를 꿈속에 출현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점이 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이 말하는 사자와 종교적 이미지에 대한 서술이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담겨있는 기독교적 이미지를 근거로 `노인과 바다'는 상례적으로 종교적인 우화로 해석된다. 노인은 고통을 겪고 성격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여 자연의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자 꿈을 꿀 뿐이다. 사자는 기독교 아이콘을 연구하는 기독교 도상학(圖像學)에선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꿈속 사자는 낙원, 내세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 등을 상징한다. 굳이 신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노인의 사자 꿈은 더 나은 형편을 향한 추구임은 틀림없다.

노인의 꿈. 여기서 꿈은 잠자는 동안에 두뇌의 활동에 의해 깨어 있을 때와 같이 어떤 영상이나 소리를 보거나 듣는 현상과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함께 가리킨다. 어쩐지 희망과 비전의 의미를 지닌 꿈은 젊어서 꾸는 것이고 노인의 꿈은 예언이나 길흉 판별과 연관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산티아고 노인의 사자 꿈은 왠지 어색하게 여겨진다. 여하튼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 노인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였다. 꿈을 꾸고 나서의 몸소 실천은 또 다른 일이고 당장 꿈은 바라는 바에 대한 쫓음이다. 성경에 나오는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라는 구절처럼 꿈은 육신의 강하고 약함이나 건강의 양호나 불량과는 상관없이 심리적 추구이며 소망의 간절한 구함이다. 늙음에 떠밀려 가면서, 어떤 꿈을 지니고 여기까지 늙어왔고 지금도 나날이 더 늙어 가면서도 아직은 꿀만큼 꿈이 남아있다. 상어 떼에게 다 뜯기고도 남아있는 뼈를 보고 청새치의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꿈 말이다.

노인더러 사자 꿈을 꾸게 해놓고 헤밍웨이는 예순두 번째 생일을 십구일 남겨둔 채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혹시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과거가 더 무겁거나 오늘이 더 중요하거나 아니면 내일은 막연하다는 이유로 가벼운 건 아니었던가. 꿈은 꿈이어야 한다. 젊어질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회춘이란 명칭으로 회춘법을 시도하지만 결국 회춘을 쫓다가 허비한 세월만큼 더 늙어 버림을 깨달아야 한다. 헤밍웨이는 세월의 불균형에 얹혀 노인임을 잊고 진짜 사자를 잡으려는 현실을 자신의 문체처럼 간결하고 명징하게 꿈꾸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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