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처음과 끝
처음과 끝
  • 의사신문
  • 승인 2018.11.26 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늙음 오디세이아 〈55〉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연말을 앞두고 가까운 친구들과 성북동에서 만났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소설가 친구의 이태준 생가를 오랜만에 한 번 들러보자는 제안을 따른 것이었다. 지금은 상업적 의지가 고택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지만, 그래도 말없는 가옥과 뜰 안의 식물과 돌덩이 등엔 본래의 의미가 그나마 서려 있었다. 그 흔적처럼 서려있는 `그나마'에 만족하며 소소한 개인사를 꺼내놓았다. 똑같은 일 년 365일 보냈는데 각자의 일 년은 어쩔 수 없이 똑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 나이가 그러하듯이 자식, 건강, 질병 이야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 때론 뒤죽박죽 - 이어지다가 집주인이었던 이태준 이야기가 자연스레 자리했다.

이상, 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구성하고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 또는 한국의 모파상으로 일컬어지는 이태준에 대한 일반적 이야기는 이미 그 친구를 통해 여러 번 들어 거의 외울 만큼 알고 있는 터라 최근엔 주로 작품에 대한 내용을 들려준다. 이번 모임은 모두 정년퇴직하고 처음 맞는 한 해의 끝자락에 갖는 까닭인지 친구는 죽음에 대한 단편 한 편을 소개했다. 성북동의 어느 초상집에서 영구 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주인공은 병색이 완연한 한 사람과 우연히 눈이 마주친 순간에 떠오른 느낌을 쓴 작품이다.

〈그저께 아침, 우리 성북정(城北町)에서는 이 봄에 들어 가장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중략(中略)--- 오늘 아침 집을 나오는 길에 보니, 개울 건너 그 울음소리 나던 집 앞에 영구차가 와 섰다. 개울 이 쪽에는 남녀 여러 사람이 길을 막고 서서 죽은 사람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도 한참 그 축에 끼여 서 있었다.

그러나 나의 눈은 건너편보다 이쪽 구경꾼들에게 더 끌렸다.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하는 그 얼굴들, 모두 검은 구름장 아래 선 것처럼 한 겹의 그늘이 비껴 있었다. 그 중에도 한 사나이, 그는 일견에 `저 지경이 되고 살아났을까?' 하리만치 중해 보이는 병객이었다.

그는 힘줄이 고기 밸처럼 일어선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만히 서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억지로 미친 듯한 무거운 시선을 영구차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옳지! 그대는 남의 일 같지 않겠구나!' 하고 측은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눈치를 챘는지 나를 못마땅스럽게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지팡이를 돌리어 다른 데로 비실비실 가버렸다.
그가 나에게 흘끗 던지는 눈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너는 지냈니? 너는 안 죽을 테야?'
하고 나에게 생의 환멸을 꼬드겨 놓는 것 같았다. ---하략(下略)--- (이태준, 〈죽음〉일부, 방민호 엮음 `모던 수필'에서)

친구의 간단없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개인의 병이나 늙음에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구나.' 최소한 죽음의 시기에 대해선 각자의 처지에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다르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 병색 완연자의 `너는 안 죽을 테야?'라는 시선처럼 `그 시기나 꼴은 다를지 모르지만 누구든 죽을 텐데'라고 이승을 `살다 죽음'으로 단순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이승을 시작과 끝으로 나누면 시작은 출생이고 끝은 죽음이다. 이 시작과 끝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꽤 눈길을 끄는 견해가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죽는다. 우리의 끝은 시작과 함께 시작된다(Nascentes morimur, finisque ab origine pendet).” 1세기경 로마의 시인이며 점성가인 마르쿠스 마닐리우스가 쓴 `천문학' 제 4권의 제16행을 몽테뉴가 자신의 수필집에 인용하여 유명해진 구절이다.

그러나, 인생을 태어남과 죽음 달랑 둘로 나누는 절약은 아무리 따져보아도 굴먹하다. 둘 사이에 틈새가 있어야 늙음이 놓일 수 있다. 물론 늙음을 삶 쪽의 한 과정으로 또는 죽음의 한 과정으로 포함시키는 생각을 나무랄 순 없지만 어느 쪽이든 늙음을 빼곤 시작과 끝 모든 과정의 방향과 순서가 순조롭지 않다.

한 사람의 출생 확률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 단지 주먹 하나가 드나들 만큼의 구멍이 뚫린 나무토막 하나가 떠다니고 있는데 100년에 딱 한 번만 해수면 위로 올라오는 어느 눈 먼 거북이의 머리가 나무 구멍에 끼일 확률보다 낮다고 한다. 이렇게 희귀하게 태어난 시작은 끝을 향해 하루 하루 늙어가지만 내일이 오늘과 똑같을 수 없으니 하루도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하루 하루가 처음 당하여 치르는 새로운 날의 탄생이다. 그래서 프랑스 작가 생 떽쥐베리는 아예 `산다는 것은 천천히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늙어가면서 내일을 여러 번 겪고 나면 그것을 `경험'이라 부른다. 그러나 경험은 과거가 되어버린 오늘들에 대한 성찰의 축적일 뿐이지 내일을 온전히 예견할 능력의 축적은 아니다.

`살았던 적이 있다'는 표현은 가능해도 `늙었던 적이 있다'거나 `죽었던 적이 있다'는 체험 표현이 불가능하듯이. 결국 이승의 시작은 새로운 경험이 보태어져 쌓이면서 끝을 향해 시시각각 늙어간다. 그래서 삶은 계속적으로 모양이 다른 새로운 탄생의 연속이라는 생 떽쥐베리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늙음은 나날이 희귀한 확률로 새로 태어나는 것.'

천천히 성북동을 나서는 걸음과 함께 깊어가는 밤, 청년 시절 언어의 방향이나 과정보다 속도에 눈이 멀어 써내려갔던 구절들이 되떠올랐다. - 처음은 처음으로 태어납니다/처음은 끝이려고 뛰고 달리다가/세상에서 제일 먼저 끝에 닿기에/처음은 끝에서도 처음입니다//처음은 처음을 잉태합니다/만약 처음이 끝을 잉태했다면/그것은 끝이 아니라 처음의 또 다른 처음일 뿐 - (유담, `처음은 끝까지 처음입니다' 에서)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