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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을 찾아서
고향집을 찾아서
  • 의사신문
  • 승인 2018.10.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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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6〉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고향집을 찾아서

남쪽하늘 저밑에
따뜻한 내고향
내어머니 계신곳
그리운 고향집

윤동주 동시 〈고향집-만주에서 부른〉 중 일부

나는 세 살 때 서울로 이사와 대학생 시절까지 17년을 영등포 한 동네에서 살았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옛 동무가 있고 꿈에도 나타나는 그립고 정든 고향인 셈이다. 기차역 뒤에 일제 때 만든 조선운수 회사의 사택지역으로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한 주택가에 우리 집이 있었다.

영등포는 한강 포구였으나 일본인들이 경공업단지로 개발하여 그 시절에도 인구가 많았다. 장마철이면 늪지가 진흙탕이 되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집에서 무릎까지 오는 긴 고무장화를 신고 포장이 안된 골목길을 건너 신작로까지 가셨다가 구두로 바꿔 신고 출근하셨다(장화는 가게에 맡겼다고!). 이름만 서울이지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어 서울 도심지에 가는 것을 “문안(四大門 안)으로 들어간다.”라고 표현하였다. 아이들은 많아 초등학교 한 학년이 천명 정도였으나, 학습 능력이 전반적으로 낮아 소위 `일류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지 모르겠지만 내 꿈에는 종종 옛날에 살던 집이 나타난다. 어릴 때 우리식구가 함께 살던 따뜻하고 그리운 일식 영등포 집이다. 때로는 그 집을 2층 양옥집으로 멋있게 다시 짓고, 또 옛 동네 전체가 새로운 꿈 같은 주택가로 좋아진 것을 꿈꾸기도 한다. 어린 시절 가족, 이웃, 친구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으나, 우리가 좀더 부유하고 내 집이 좀더 좋았으면 하는 바램이 숨어 있었나 보다.

중외제약에서 만든 학술복지재단의 사업 중 하나가 의료봉사를 훌륭하게 하는 분을 찾아 시상하는 일이다. 여기에 나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올해에는 영등포에 있는 자선 병원 원장님을 선정하게 되어 현지 방문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찾아가보니 바로 그곳이 역 근처로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길이었다. 역 앞에는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안에는 각종 상점과 식당이 있어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옆 빈민가 쪽 방 촌은 옛날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고 자선 병원이 이들 주민과 외국 노동자에게 의료서비스는 물론 전인적 구호활동을 하고 있었다.

현지 심사를 끝내고 나는 45년 만에 온 이곳에서 어릴 때 살던 집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동안 이 동네에 큰 고가도로가 나고, 도로가 넓혀지고, 새로 건물이 들어서 옛날의 모습과 위치를 좀처럼 감 잡을 수가 없었다. 주소도 최근에 새로운 체계로 바뀌어져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 집이 도로에 흡수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길가에 있는 동네 병원을 찾게 되었다. 서울의대 선배가 개업하던 병원으로 나도 자주 신세를 졌는데 지금은 표지석 간판만 있고 이층 병원은 폐업을 했는지 문이 닫혀져 있었다. 현 의료계의 실정을 보는 것 같아 반가운 순간에서도 마음이 착잡 하였다. 그러고 보니 옆에 이름은 바뀌었지만 단골 목욕탕도 있었다. 근처 미군부대가 있던 길을 따라 가면서 기억을 더듬어 드디어 우리 골목을 찾았다. 우리 집으로 짐작되는 주택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린 채 서성대다가 대문 구석에 하얀 백목으로 적은 592-20이라는 희미한 글자를 보게 되었다. 바로 우리 집 주소였던 `영일동 592-20번지'인 것이다!

일본식의 가옥은 없어지고 4층의 다가구 주택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집 뒤쪽 축대는 낡았으나 예전 모습으로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낮아 보였다. 골목 안의 모든 집들이 비슷한 다가구 주택으로 바꿔져 있었다. 꿈과 기억 속의 동네와 비교하니 내가 소인국에 온 거인 같은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야구를 하면서 놀았던 그 넓은 골목은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역까지 걸어가던 그 먼 거리는 몇 걸음 안되게 훨씬 짧아 진 것이 아닌가. 

골목 밖을 나가보니 길거리 상점 간판에 웬일인지 중국 한자가 많이 보였다. 정신을 차려 생각해 보니 아마도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변한 것 같았다. 경공업단지가 있어서 외국 노동자 특히 중국에서 온 노동자나 조선족이 모여 살게 되었나? 옆에 있던 미군부대의 자리는 나중에 OB맥주 공장이 들어섰으나 지금은 공원으로 바꾸어져 있었다.

요즘 서울과 대도시는 어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서울의 각 지역을 오래간만에 가보면 높다란 빌딩으로 바뀌어져 있는 곳이 너무나 많다. 멀쩡한 아파트도 20내지 30년이 지나면 철거하고 고층아파트로 다시 짓는다. 우리 앞 부모님 세대는 꽃피고 새가 지저귀는 마을이 고향이었고, 우리 세대는 아이들과 뛰어 놀던 주택가가 고향이었다. 아파트에서 자라난 우리 다음 세대는 재개발로 신축한 번듯한 고층아파트에서 어린 시절과 고향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을까? 추억 속의 낡은 아파트가 화려한 건물로 변해서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향을 잃은 세대는 세상살이가 훨씬 더 각박하고 힘들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마음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옛 집은 내 꿈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슬픈 것은 꿈 꾸던 아름답고 좋은 집으로 바뀌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돈벌이 만을 위해 모양새 없는 다가구 건물이 서 있기 때문이었다. 비정한 현실감과 함께 떠오르는 실향(失鄕)의 느낌에 갑자기 나는 고아처럼 외로워 졌다. 오늘 밤 꿈속에 우리 집은 어떻게 나타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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