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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 것이 없는 의사의 잘못
잘못한 것이 없는 의사의 잘못
  • 의사신문
  • 승인 2018.10.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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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5〉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우리 사회의 `신뢰'는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1996년 한 유명한 경제학자가 사회적 신뢰의 가치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있었다. 이 경제학자는 개인이 속한 집단인 가족, 기업, 사회, 국가 등 중에서 가족(혈연) 관계에서만 신뢰가 존재하면 저신뢰사회, 혈연을 넘어 공통된 관심사에 대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가치를 공유하면 고신뢰사회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저신뢰사회로 중국, 이탈리아, 한국을, 고신뢰사회로 독일, 미국, 캐나다 등을 들었다.

그로부터 20년, 우리 사회의 신뢰는 개선되었을까? 2014년 영국의 한 연구소가 142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자본지수 조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뢰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1위인 노르웨이는 74.2%가 그렇다고 대답하였으나, 한국은 25.8%만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2012년 OECD는 소속 32개국의 사회자본지수를 평가하였는데, 한국은 29위였다. 심지어 멕시코가 27위였다.

위와 같은 외부의 평가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가 `불신'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소한 일 하나도 이해관계가 달린 경우에는 그 증빙을 엄격하게 요구하지만, 거짓말이 드러났을 때의 제재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심지어 우리는 신뢰를 해친 사람과 그것을 미리 확인하여 걸러내지 못한 사람의 잘잘못을 비슷한 수준으로 논하는 경향까지 있다(불신은 당연한 것인데, 너는 충분히 불신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직으로 말하여지는 의사와 변호사, 두 직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의사나 변호사가 아닌 사람들은 `고소득'이라고 하겠지만, 당사자인 의사나 변호사는 `라뽀' 또는 `신뢰'라고 할 것이다.

의사와 환자의 계약은 의사의 지식, 경험, 기량, 심지어 인격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여 줄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위임계약이다. `이 의사가 내 건강을 최선을 다하여 보살펴서 최선의 상태를 만들어 줄 사람이다'라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종합적 신뢰 없이는, 제대로 된 진료의 제공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변호사 역시 동일하며, 변호사 광고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 역시 `믿음', `신뢰'이다.

이번 글에서 `신뢰'의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은, 얼마 전 선고된 법원의 판결 중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례를 접하였기 때문이다.

A 환자는 만취상태로 옥상에서 낙상한 뒤 오른쪽 다리와 엉덩이 통증으로 B 병원 응급실에 내원하였다. A 환자는 오른쪽 대퇴골 돌기사이 분쇄 골절, 오른쪽 하퇴부 개방골절 등의 진단을 받았다. B 병원 의료진은 수술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A 환자에게 3년 전에 발병한 횡문근융해증 및 저산소증 등으로 전신마취수술이 어려웠다. 그래서 A 환자의 회복 후 수술을 계획한 후 간경화증과 횡문근융해증과 관련하여 소화기내과, 호흡기내과, 정형외과와 협진하다가 수상 10일 후에 A 환자의 상처부위에 대하여 개방성 고관절 도수 정복술을 시행하였다.

수술 5일 후 A 환자의 수술부위에 고름이 발생하여 균배양검사 등을 한 결과 MRSA가 배양되었다. 그 7일 후 절개, 배농, 세척, 변연절제술을 시행하였으나, 1개월 후에 감염이 재발하였고, 보름 뒤에는 골수염으로 이환하였다. 이후 CRP가 감소하는 등 차도가 있기도 하였으나, 6개월 후 수술부위에서 MRSA가 재차 발견되었다. 결국 3년 가까운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A 환자는 수상 이후 5년 만에 만성 골수염 진단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오른쪽 대퇴골의 90% 이상이 소실되고 대퇴부 근육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으며 오른쪽 하지가 11㎝ 단축되었다.

이에 A 환자는 B 병원 의료진이 최초에 수술을 지연한 과실, 수술 중 수술부위에 혈종을 발생시킨 과실, MRSA를 야기하고 감염확인을 지연하였으며 경과관찰을 게을리한 과실, 설명의무를 위반한 과실 등을 이유로 병원에 9억 5천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B 병원 의료진의 과실은 전혀 없다는 판단을 하였고, A 환자에게 미지급한 몇 천만 원의 입원치료비용의 지급까지 명하였다. 특기할만한 점은, 법원은 A 환자의 MRSA 감염은 B 병원 내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B 병원 의료진이 감염관리와 경과관찰을 게을리하였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법원은 의료진이 아무리 철저한 소독체계를 갖춘다 하더라도 완전한 감염예방은 불가능하므로 병원 내에서 감염이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무조건 의료진의 과실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전제하고, 나아가 B 병원 의료진이 감염 확진을 위한 검사, 예방적 항생제 사용 및 경험적 항균제(isepacin 및 flumarin)의 투약, 지속적인 감염내과와의 협진을 통한 적절한 여러 조치들을 시행하였음 등을 고려할 때 B 병원 의료진에게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A 환자에 대하여 안타까운 점은, 재판 과정에서 법원이 여러 차례 조정에 회부하는 등 분쟁의 원만한 해결을 시도하였음에도, A 환자는 계속 이를 거부하고 일도양단식의 판결을 원하였다는 점이다.

A 환자는 자신을 3년간 최선을 다하여 치료하여 준 B 병원 의료진에 대하여 `신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신뢰가 없었다면 3년이나 같은 병원, 같은 의료진으로부터 치료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신뢰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A 환자는 악결과가 발생하자 그 신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나는 네가 최선을 다하였는지 믿을 수 없다. 법을 통하여 확인해 보겠다'라며 B 병원과 그 의료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패소와 모든 소송비용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의료 현장에서의 저신뢰 문제는 환자와 의사간의 갈등을 증가시키고,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갈등과 불신의 해소나 경감을 위한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의사를 믿지 못하여 몇 겹의 돋보기로 의사의 진료비 청구를 관리하는 정부나, 최선을 다한 진료를 받고서도 이를 믿지 못하여 무익한 소송을 제기하는 일부 환자들을 전제로 구축된 저신뢰 시스템 안에서, 신뢰를 전제로 업무를 행하여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피곤한 일이며, 심지어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의사가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악결과를 두고, 신이 아니므로 잘못한 것이 없는 의사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남의 일일 경우에는 의사 잘못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신이나 가족의 일일 경우에는 의사 잘못이라고 한다. 의사의 선의에 대한 사회의 신뢰를 기대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사치에 가깝다. 사회 구성원 4명 중 1명만이 다른 구성원을 신뢰하는 한국 사회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것, 그것이 잘못한 것이 없는 의사의 잘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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