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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암묵적 합의 `1등만 기억하는 세상'
무시무시한 암묵적 합의 `1등만 기억하는 세상'
  • 의사신문
  • 승인 2018.10.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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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외과 의사의 영화 이야기 〈4〉 4등/위플래쉬/400번의 구타 

이 형 중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36년 전, 나름 우수한 연합고사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소년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넌 서울대 가야돼.”란 말을 들으며 월말고사 전교 등수가 떨어질 때마다 손수 물을 묻혀 탄력성을 강화시킨 오동나무 막대기에 엉덩이를 내어 주면서 스스로를 담금질하였다.

영화에서 보던 매력만점의 외교관이나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기자가 되길 꿈꾸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나가셨던 아버지가 몇 년 만에 병을 얻어 귀국하셨던 그 해 여름방학 “너는 나처럼 문과 나와서 주위사람 눈치 보지 않게 의사를 해라.”란 말에 생애 처음으로 전과기록(문과에서 이과)을 남기게 되기까지.

그러나 `착한 아들'이기를 자처했던 소년은 그다지 굳건하지 못했고 벡터와 함수, 황도-백도 같은 누런 갱지 안에 적혀있던 골치 아픈 그림과 숫자들보다는 전자오락실과 농구장이 더 적성에 맞았다. 죽어도 재수하기는 싫었던 그는 그냥 적성(적당한 성적)에 맞추어 서울시내 만만한 의대에 입학했다. 지옥과도 같았던 예과 1학년(두 학기)은 세 개의 F학점, 만나지 4개월 만에 첫사랑 여인네(그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이므로 감히 파랑새라 불렸다)로부터의 마지막 결별 통보, 8kg의 체중 감소, 수학 재시, 그리고 마지막 시험이었던 세모의 어느 날 1학년 전체 회식, 허무감에 소주잔만 들이키더니 피를 토하며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어 L-튜브를 꽂은 채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는 평생 1등이 되지 못한 채 `용꼬리보다는 뱀대가리가 되자'며 스스로 속여가면서 살고 있다.

몇 년 전 애석하게 죽어간 환자 옆에 황망히 무릎을 꿇은 내게 보호자가 남긴 한 마디는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병원 응급실로 왔던 그 때, A병원이 아닌 여기로 온 게 가장 후회가 됩니다.”라는. 비록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의반 타의반의 선택을 하여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나름대로는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일들(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들과 열심히,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들)에 항상 최선을 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책임과 권한, 의무가 커지면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채 사방이 옥죄어 오는 답답함을 느끼는 일도 많아지게 되었다. 혹시 내 후배와 제자들도 나처럼 열등감과 피로감, 그리고 체념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

남을 이기면 일등이 되지만 자신을 이기면 일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얄팍한 잣대로 어릴 때부터 줄 세워서 등수를 매기는 습관에 길들여져서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방송에 나올 법한,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흙수저의 입지전적인 인생성공담에 불과할 뿐이다. 최근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진입문턱은 분명 존재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선택 받은 사람들(동일한 계급적 표상들을 공유하는 좋은 학교, 상류층 출신들)이 자리한 그 `위'는 엄청나게 배타적인, 그러나 너무도 달콤한 꿀이 흐를 것 같은 샹그릴라일 것이다.

수영을 좋아하는 소년은 물속의 색다른 풍광과 유영을 하면서 쳐다보는 햇살이 좋고 친구들과 떠드는 게 재미있을 뿐이다. 준호는 재능은 있는데 매번 4등만 하여 뒷바라지하는 엄마는 속이 상하다. 아이의 내면에 승부욕이 없음을 직감한 엄마는 과거 수영천재였지만 현재는 그냥 평범한 수영코치로 전전하는 광수를 만나 아들을 1등으로 만들어 주길 부탁한다. 그리고는 예견한대로 코치의 사랑의 매(체벌의 미화)의 힘에 힘입어 준호는 1등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은 아슬아슬한 2등이 된다.

준호의 동생 지호는 옷을 갈아입던 형의 몸에 난 생채기를 발견하고는 고기를 구워먹던 자리에서 가족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 동안은 매를 맞지 않아 4등만 했던 거야?” 그 순간 비겁함이란 보이지 않는 망토는 엄마와 아빠 모두를 둘러 싸버린다.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 좋으면 어찌되어도 좋다는 무시무시한 암묵적 합의는 가정을 편안한 쉼터가 아닌 전쟁터보다 더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엄마의 단말마적인 발악은 가족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나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인게 더 무섭다.”

영화 〈4등, 2016〉의 마지막 장면은 전적으로 준호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코치와 엄마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물속에서 시합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놀이를 완성하기 위한, 자유의지로서의 수영 행위는 2016년 브라질 올림픽 당시 꼴찌로 레인을 통과하던 제3세계 수영선수의 그것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둘 다 박수를 받지만 준호는 바라던 일등을 했다는 결과가 다르다.

재능은 있어 아시아신기록을 가졌던 자신을 통제하지 않았던 대표팀 코치의 수수방관 때문에 스스로 낙오되었다는 믿음을 가진 코치 광수의 빗나간 교육방식은 드럼치는 게 미칠 듯이 좋았던 대학신입생 앤드류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가학적인 교수 플래쳐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위플래쉬, 2014〉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을 구현하기 위해 사제지간이라는 클리쉐를 차용하여 닦달 끝에 제자를 자신과 똑 같은 광인으로 만드는 또 다른 영재교육의 폐해를 보여 주고 있다.

모욕과 폭력을 묵묵히 참고 수련하던 제자는 어느 순간 드럼 이외에는 인생의 목표가 없어져 아버지와 다투고, 여자친구와도 무덤덤하게 작별하게 된다. 이윽고 사제지간이 필연적으로 정리되어 각자의 길을 걷게 되던 중 지휘자로 만난 옛 스승에게 브레이크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한다. 마지막 연주과정은 내내 총성과 폭발음, 비명이 가득한 아비규환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채찍질과 재즈 밴드가 연주하는 드럼의 독주부분을 모두 의미하는 중의적인 제목 위플래쉬는 일류를 쟁취하기 위하여 세상과 단절하는 음악 스릴러 영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플래쳐가 한 말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는 그런 면에서 섬뜩하다.

도식화된 제도권이라는 명징한 결계는 이미 수십년전부터 존재해왔다. 기득권층이 사회의 안녕을 추구하고자 구성원들을 온순한 양으로 생산하기 위해 고안해낸 통념이라는 울타리(우리의 어원이라니 참 웃긴다)는 학생시절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 규율 내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뒤쳐진다는 이유(특히 받아쓰기) 하나만으로 문제아가 되어버린 앙트완은 무관심한 부모와 억압적인 학교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일탈을 거듭하고 달리지만 결국 소년원에 갇히고 만다.

〈400번의 구타, 1959〉의 마지막 장면. 소년원에서 빠져 나온 그가 쉴 새 없이 달려 닿은 곳은 파도만 일렁이는 바다였다. 뒤통수를 가득 찼던 화면은 어느새 뒤를 돌아보는 소년의 텅빈 얼굴로 대체된다. 보호소로 실려가는 차 안에서의 눈물과 너무도 대조되는 소년의 대책없는 멍한 얼굴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겨드랑이의 가려운 날개를 접거나 찢으면서 둥근 돌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몰개성화된 자화상이기도 하다.

아들이 재수를 하고 또 반수를 하면서까지 대학입시에 매달릴 때까지 몰랐다. 우리 사회의 층층으로 정립된 학교서열이란 것이 얼마나 준엄하고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는지. 그저 막연히 나의 회색빛 학창시절처럼 세월이 지나면 웃음을 머금게 하는 정도의 통과의례로만 생각했었다. 젊음을 소진하는 후배, 제자 전공의들의 모습이 지금 가슴 한구석에 사무친다. 박봉의 월급에 허덕이며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교수와 항상 녹음기를 켤 준비가 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환자 보호자 사이 어딘가에서 어서 전문의가 되어 접힌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후진 병원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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