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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아주 지팡이 청려장
명아주 지팡이 청려장
  • 의사신문
  • 승인 2018.10.2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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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50〉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올해 우리나라 노인 천삼백 사십 삼 명이 백세를 맞아 노인의 날인 10월2일 대통령으로 부터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 청려장(靑藜杖)을 선물 받았다. 장수를 축하하고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기원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의 시작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도 예전엔 여왕이 백세 노인에게 지팡이를 선사했다가 요즈음엔 생일에 맞추어 축하카드를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청려장은 퇴계 이황이 쓰던 것으로 안동에 위치한 도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1960년대 만해도 서울 곳곳의 공터 어디고 명아주가 흔했다. `는쟁이', `능쟁이', `개비름' 이라고도 불렀다. 영어로는 잎 생김새가 거위발 모양을 닮아서 `goosefoot'다. 중국에선 명아주를 `홍심리(紅心莉)'라 한다. 여름에 파랗던 잎이 가을이 되면 밑동부터 붉게 물드는데, 이 붉게 물든 명아주 잎이 붉은 심장 같아 붙여진 별칭이다. 여름 밭작물 기르는 데에 영 귀찮은 일년생 초본 식물이지만 그 줄기가 질기고 강해서 질 좋은 지팡이 재료로 대접을 받는다. 곧추 자란 줄기는 높이가 1내지 2미터에 달하는데 처음엔 녹색 줄이 있다가 성숙 후에는 붉은빛을 띤다. 명아주 잎이 돋을 때 푸른색이어서 명칭에 푸를 청(靑)을 넣어 `청려'라 하는데 이 푸른색에 몰두한 도가(道家)에선 명아주를 영원과 장수의 식물로 비유한다. 비록 한해살이 풀이지만 올곧게 선 모습이 굳세면서도 건실하고 산뜻한 모습이 고아(高雅)한 학의 목을 닮았다 하여 학항초(鶴項草)라 불리기도 한다.

청려장은 명아주 줄기를 말려서 만드는데, 기르고 마르고 기름 먹이고 옻을 바르는 등의 윤내는 정성을 듬뿍 받고 나면 효도와 장수의 상징이 된다. 명아주 지팡이는 우선 가볍고 단단하다. 그리고 옹이가 지고 울퉁불퉁한 겉모습은 힘이 있어 보이고 점잖기까지 하다. 게다가 고르지 않은 지팡이 표면은 잡은 손바닥에 건강한 느낌의 자극을 준다. 실제로 `본초강목'에 따르면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자연스레 손바닥 지압이 되어 뇌 자극이 원활해져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 밖에 천식, 신경쇠약, 히스테리, 간장 질환, 종창, 류마치스, 가려움, 어루러기, 설사, 해열, 제습, 해충독 제거 등에도 민간요법으로 쓰곤 했었다. 일설에는 명아주 자력성이 세어서 그렇다고 한다.

명아주 지팡이에 담긴 이런 상징과 이야기들은 여러 시인들의 마음을 끌어 시 속에 청려장을 등장시키게 했다. 당나라 두보는 `모귀(暮歸)'[해 저물어 돌아가다]에서 쉰 살을 넘어서며 구름이 더 가깝게 보이는 삶의 내일을 청려장에 의지하는 해질녘을 쓸쓸히 읊고 있다.

霜黃碧梧白鶴棲[상황벽오백학서] 서리에 지친 푸른 오동에 흰 학이 깃들고
城上擊柝複烏啼[성상격탁복오제] 성 위에서 딱따기 소리 까마귀 울음과 겹치네
客子入門月皎皎[객자입문월교교] 나그네 문에 들어서니 달빛 휘영청 밝은데
誰家搗練風凄凄[수가도련풍처처] 어느 집의 능숙한 다듬이질에 싸늘한 바람 쓸쓸하네

南渡桂水闕舟楫[남도계수궐주즙] 남으로 계수를 건너려니 노 젓는 배도 없고
北歸秦川多鼓찣[북귀진천다고비] 북으로 진천에 돌아가려니 말위의 북소리 잦구나
年過半百不稱意[년과반백불칭의] 나이 쉰 넘어도 뜻대로 된 것 없고
明日看雲還杖藜[명일간운환장려] 내일도 명아주 지팡이 짚고 구름 바라보겠네.

노인을 상형화한 늙을 `로(老)'는 머리가 부옇게 일어서고 등이 구부정한 늙은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노인의 특성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인문(人文), 즉 노인의 무늬로는 지팡이가 으뜸이다. 지팡이가 노인의 주요한 무늬인 점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늙음의 신 게라스(Geras)도 늙고 등이 굽고 지팡이들 든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자연히 지팡이는 노인의 전형적 무늬지만, 젊은 사람도 의학적 사정이거나 상중(喪中), 등산과 같은 운동 등의 경우에 한정된 장소에서 사용한다. 노인이라도 과거엔 늙은 정도에 따라 지팡이를 짚을 수 있는 장소의 제한이 있었다.

`五十杖於家 六十杖於鄕 七十杖於國 八十杖於朝(오십장어가, 육십장어향, 칠십장어국, 팔십장어조)' (오십에는 집안에서 지팡이를 짚다가, 예순이 되면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흔에 이르면 나라에서, 여든에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 - (`예기(禮記)' `王制篇(왕제편)')

즉, 집안에서 쓰는 가장, 마을에서 쓰는 향장, 나라에서 쓸 국장, 그리고 임금님 계신 조정에서 짚을 조장의 순으로 나이가 들수록 지팡이 짚는 공간이 넓어진다. 그래서 50세가 되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가장을, 60세가 되면 마을에서 향장을, 70세엔 나라에서 국장을 선사하고, 80세면 임금님이 조장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팡이를 짚고 다닐 넓이는 나이를 상징하여`장가(杖家)'는 오십 세, `장향(杖鄕)'은 육십 세, `장국(杖國)'은 칠십 세, `장조(杖朝)'는 여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최근엔 평균 수명이 길어져 백세 노인에게 청려장을 선물한다. 집 대문을 나서 마을을 거쳐, 나라 곳곳을 두루 짚으며 원한다면 임금님 사는 곳도 자유롭게 걸음하시라는 존경과 소망으로 드리는 지팡이니 이보다 더 한 축복이 어디 있을까. 청려장, 한해살이 풀줄기로 만든 지팡이에 담겨 있는 백 살의 축복이다. 글을 맺으며, `지팡이'란 말의 뜻을 되짚는다. `걸음을 도우려고 짚는 막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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