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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운다
역사에서 배운다
  • 의사신문
  • 승인 2010.07.0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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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 이정균 원장
북한산은 하나의 바위 성채(城砦)다. 그 성채 속에는 백운대(718m), 인수봉(811m), 만경대(801m), 노적봉(718m)이란 큰 돌, 거석(巨石)이 솟아있다.

북한산은 가까이서, 멀리서 보아도 하늘 향해 힘껏 발기(勃起)해 있는 남성의 모습이다.

북한산은 `선바위'의 전형이며 암석숭배, 거석숭배의 징표였다. 어디서 보건 북한산은 첫눈에 삼각산(三角山)으로 다가오며, 뫼산(山)이라는 상형의 문형의 본(本)이라는 삼각지형으로 보이니 그 옛 이름 삼각산 찾기에 나섰다. 북한산은 한산(漢山)에서 유래한다. 한산은 `큰산'이라는 뜻의 `아래아한산'을 한자에서 차음하여 쓴 이름이다. 북한산 `선바위',`거석'은 민속신앙의 텃밭 화강암 산수(山水)의 전형이다. 흰 화강암이 낙락장송과 어울린 풍경은 한폭의 산수화 ; 흰빛과 푸른빛의 대비가 짙은 북종화의 화폭이다.

`택리지'의 이중환은 “산모양은 반드시 돌로 된 산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맑다”고 했다. “산은 깊은 꿈이다”. 문학 평론가 김현의 표현이었다. 그는 다시 부연하여 “청계산은 부드러우나 거친맛이 없고, 관악산은 거칠지만 부드러운 맛이 없다. 그둘을 갖춘산이 북한산”이라 했다.

북한산 바위 거석체험은 남성발견이라면, 북한산성의 구멍체험은 여성발견으로 상징된다. 북한산은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발견하게 하는 음양조화를 이룬 기(氣)의 덩어리 바위산이다. 거석은 자연적 소산물이요 성문(城門)의 구멍은 인위의 유적이다. 그래서 거석체험은 공간체험이 되며 구멍체험은 시간체험이 된다. 우리들은 북한산을 찾아 거석체험으로 세계관을 넓혀 가게되고 구멍체험으로 세계관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구멍은 한쪽세계에서 다른쪽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다. 신(神)은 구멍이 없는 완전자, 인간은 구멍이 있는 집합체라 한다. 북한산은 12대문, 12개 구멍을 지닌 인간적 존재에 비유된다. 북한산은 `구멍'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속의 산나라 산국(山國)에 들어설수 없다.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부르고 있으나 서울을 감싸고 있지않다. 서울은 서울이며 북한산은 북한산이다. 북한산은 어찌보면 서울에 등을 돌린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다.

백운대 부근에 솟은 삼각 정점에서 좌청룡,우백호로 뻗은 좌우능선이 의상봉과 원효봉을 지날 때까지는 자연능선이 완벽한 성채를 이룬다. 북한리 계곡은 산국의 폐쇄회로에서 제외되고 있다. 물고를 터준다. `대서문'은 인위적으로 북한산 산국의 폐쇄회로다. 그러니까 대서문 일대를 제외한 북한산성의 모든 구간은 자연석벽이요, 그 분수령 따라 석축을 조금씩 쌓고, 북한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고갯마루에 성문을 세워 안팎 교통이 이루어질 `구멍'을 내놓은 것이 북한산성의 본 모습이다. 산성을 둘러보면, 산성이 지키고 있는 것은 한양땅, 서울이 아니라, 그 안쪽 산국임을 알게 되며, 성벽도 외적의 공격을 막을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겠는가. 삼국시대 이래 북한산 일대는 국토 방위 개념상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되었고 `북한산을 얻는 자는 이땅을 얻는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었었다고 한다. 북한산 바위성은 자연장벽이 되어 적군의 진입으로 부터 사직(社稷)을 지킬수 있는 철옹성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4대 개루왕 5년(132)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당시 북한산은 백제의 대북방 전진기지 였다. 백제 제 13대 근초고왕은 북한산 일대에 머물면서 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참살하기도 했으나 고구려 제 20대 장수왕은 실지회복에 나서 백제는 한강유역을 모두 잃으며 개로왕은 전사하였고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다. 북한산성의 실지회복을 노린 백제 제 26대 성명왕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과 연합전선을 펴 뜻을 이루기도 했지만, 끝내 신라는 이땅을 차지 하였고 고구려와 접경을 사이에 두고 신라의 북진통일 정책과 고구려의 남하정책의 결전장이 되어, 신라진평왕 25년 고구려 무왕원년에 있었던 양국의 전투는 우리나라 수성전(守城戰)사상 가장 뛰어난 전공으로 평가되었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의 북한산비를 보라.

북한산성같은 천혜의 방어기지가 필요했던 임진, 병자년의 굴욕적 난리를 겪고 나서야 북한산에 성을 쌓아야 한다는 깨달음의 싹을 틔웠지만, 조정은 정신차리지 못하고 산성 쌓는 문제를 놓고 7년이란 긴 세월을 갑론을박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 선조 재위29년 1596년 왜구의 재침대비 북한산성 축성을 계획한 바 있으나 전란의 피해 등으로 실현을 못하였고, 병자호란때 심양에 인질이 되었던 효종에 의한 축성론은 왕의 불의의 죽음으로 인해, 북벌론과 함께 역사속에 숨어버렸다.

조선 숙종이 즉위하여 축성논의는 본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숙종의 결심으로 축성공사를 시작하였을 때 그 대역사(大役事)는 놀랍게도 6개월에 끝나버렸다니….

북한산성 20여리 길이의 축성작업이 마무리 된 배경은 천연요새의 기막힌 여건이 아니었겠는가? 산성 구축 시에, 타원을 이루고 있는 분수령의 용틀임 따라, 그 능선상에 약간의 석축만을 쌓아 올리고, 고갯마루에 성루(城樓)를 쌓아 올리는 작업만으로도 철통같은 방어 기지를 만들 수 있었던 지리(地利) 때문이었다.
조선 숙종의 결심. 선열들의 노고를 통해 한양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단 유사시를 대비한 북한산성은 한번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를 맞기도 했다는 한탄이 크고 또 속상한 일이었다.

아! 어찌 잊으랴! 제3공화국 시절 김신조 일당이 이 산성 기슭을 따라 그토록 삼엄했던 경계지역을 뚫고, 청와대 까지 침투했던 놀라운 사건! 북한산의 용틀임맥이 청와대나 경북궁 옛날 중앙청으로 전략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소름끼쳐 놀랄일이 없도록 우리의 마음과 힘을 다시 한번 가다듬어야 할 시기가 아닐런지.

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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