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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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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8.10.1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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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75〉

박 송 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친구는 대학 교수직에서 은퇴를 한 후, 홀로 남해 바다 외딴 섬으로 갔다.
낮에는 넓고 푸른 바다를 품고, 밤에는 하늘 총총한 별빛을 가슴에 담으며, 파도 소리에 잠들고 파도 소리에 깨어나는…
적어도 몇 년은 바닷가에서 편안하게 소일하며 지내는 것이 오랜 직장 생활 동안 한결같이 바라던 소망이었지.

햇볕 좋은 날, 바람 잔잔한 날이면 낚시 도구를 챙겨 집에서 나서고, 집 앞의 나지막한 해변 언덕을 내려가 호젓한 갯바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운다고 한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챙 넓은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날아드는 갈매기를 친구 삼아 세월을 낚는다고 했지.
바람도 쉬어가야 멀리 갈 수 있다고 했던가.

갯바위 물결 위에 잠시 멈추는, 그러다가 쏜살같이 달아나는 세월을 잡는다고?
낚시 바늘을 물고 힘차게 솟구치는 물고기.

어찌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그들의 열망이 아니겠어?
햇살에 부서지는 은빛 비늘의 싱싱함. 보기만 해도, 상상하기만 해도 우리의 인생이 젊어지는 것 같지 않나.
그러나 바다 밑은 오로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공간의 침묵만이 존재할 뿐이지. 

오늘도 자네는 젊은 날의 아스라한 기억을 회상하며, 바다 속에 세월의 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겠지.

■기다림
어떤 날은 방파제에 낚시 짐을 풀어 놓고,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종일 소파 블럭(tetra-pot)에 앉아 부두를 바라본다고 했었지.

하루에 한 두 차례, 배가 떠나고 떠났던 배가 다시 들어오고…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세상만사가 만남과 이별로 이루어진 게 아니겠나.

이국(異國)의 연초록빛 해안에서 스노클링을 하다 바다 그림자에 영영 묻혀버린 아내가 그리운가.
기다림에 지친 한낮의 무거움으로, 석양이 지면 결국 자신의 빈자리만 우두커니 지켜보게 될 뿐이지.

그래도 행여 마음속에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당신에게, 바다 위에 카펫처럼 내려앉는 찬연한 달빛 길로, 왜 오지 않느냐고 목청껏 크게 외쳐 보라구. 물론 이제는 그럴 나이도 지났지만…
만남과 이별, 연민의 추억을 지워가는 것도 여남은 생의 과정이 아니겠어.

떡갈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지는 순간, 열매는 나무와의 인연이 끝나는 거지.
풀숲을 헤치는 다람쥐나 고라니의 먹이가 되든가, 흙 속에서 그대로 썩어 가든가, 운이 좋으면 다시 참나무로 태어나는 거야.

그러니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마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의 빈자리를 정리하지 못하는 게 아니겠나.
사무치게 애틋한 그리움조차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만 더하므로…

■먼 훗날
산봉우리 높은 곳에 펼쳐진 새털구름, 먼 훗날은 그냥 그렇게 아득하게 있는 줄로만 알았어.
4월의 보랏빛 라일락 향기에 취해 있다가, 긴 여름의 폭염에 정신없이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은행나무 노란 잎이 계절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거지.

오후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면서, 공원에 핀 꽃들이, 마른 가지의 나뭇잎들이 갑자기 떠나야 한다고 말 할 때, 그리고 당신의 돌아서는 모습에서 슬픈 표정을 느낄 때에야, 먼 훗날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폭염 끝에 만난 신선한 대기와 청명한 하늘, 우리는 따사로운 햇살의 평안함이 그저 오랫동안 지속하기만을 바랐지. 아무런 작별 준비를 못한 채…
만추의 단풍 길을 지나면, 황량하고 바람 센 나목의 숲을 걸어가는 우리의 쓸쓸하고 음울한 그림자가 창밖에 다가서겠지. 

그렇지만 아니야,
간혹은 서랍에 넣어둔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지난날의 정겨운 일들을 돌이켜 보기도 할 거야.

서로 다투며 상처를 주었던 일들도, 그 아픔마저 녹여지는 어제와 같은 옛날인 것을…
지나 온 날을 뒤돌아보는 것이 아마도 앞으로는 흔한 일상이 되겠지.

그러나 더 이상 과거에 머물기 싫어지면, 한적한 산행길 모퉁이에 작은 돌탑이라도 만들어 갈 거야.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간절함이 아니라, 살아온 삶을 정리하듯 마음을 비우고 작은 돌이라도 한 점 한 점 쌓아 갈 거야.

내가 없는 먼 훗날, 이 길을 지나는 누군가가 또 하나 자신의 추억을 얹어 놓고 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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