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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 내 시력도 당신 몸과 같이 늙고 있어
늙어가는 아내에게 - 내 시력도 당신 몸과 같이 늙고 있어
  • 의사신문
  • 승인 2018.10.0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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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48〉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늙어가는 아내에게' 마지막 연, 황지우)

어느 이는 욕망의 목적은 달성이 아니라 대상을 바꿔가면서 얻고자 하는 끝없는 지속이라고 한다. 그런 목적을 누르고 한 사람만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오면서 어디 고빗사위가 없었겠는가? 대상을 바꾸거나 바뀔 곡절을 다 헤쳐 나오며 지속이 끊길 고비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늘그막에도 부부가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일은 욕망 그 이상의 욕망이다. 적어도 한평생은 살아보고 나서 “우리 괜찮았지?”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부만이 바라고 달성할 수 있는 동행의 욕망이다.
나무의 가지나 눈을 잘라서 다른 나무의 줄기나 가지에 옮겨 붙이는 걸 `접목'이라 한다. 둘 이상의 다른 현상 따위를 알맞게 조화시킴을 비유하여 가리킬 때도 쓰이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 복효근은 그 동행을 `접목'이라 부른다.

“늘그막의 두 내외가 / 손을 잡고 걷는다 /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 제 뿌리 환해지는, /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 이녁이 몸살을 앓는, /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 저 접목 /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접목接木', 복효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건 현상이다. 하루는 둘이 마치 한 가닥 실처럼 한올지게 붙었다가 또 하루는 틈이 벌어져 버성기면서도 두 내외가 오래오래 늙어가는 일은 질긴 인연의 접목 현상이다. 성한 살갗보다 긁히고 베인 상처를 서로 맞대어 너의 살갗으로 쓰리고 아린 늙음을 감싸주는 접목이다. 상처 - 영광의 상처일지라도 - 나지 않은 늙음이 있을까. 따라서 손을 맞잡았다는 말은 상처를 맞대어 덮어준다는 말과 동의어다. 시인의 표현대로 늙음의 동행은 상처의 맞닿음이고, 상처의 마주 포갬은 비로소 서로 살려주고 살아주는 접목이다.
접목이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차곡차곡 세월이 쌓여 늙어야 비로소 돋아나는 슬기가 있고, 눈이 어두워져야 드디어 보이는 사리가 있다.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고 맞대고 늙어가야 슬기와 사리가 돋고 보인다. 부부간에도 그렇다.

““서두르지 마오, 쉬지도 마오” /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지니고 / 비바람 속에서도 꽃피는 길에서도 / 한결같이 한 생을 살아보구려 // “서두르지 마오” 이 한 말씀을 / 마음을 바로 잡는 고삐로 삼아 / 깊은 사려, 올바른 판단 / 단 한 번 결심이 끝난 다음엔 / 온 힘을 기울여 앞으로만 나가시오 / 훗날에 후회 없게 걸어가시오”(`서두르지 마오, 쉬지도 마오' 일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한 남편에게 물었다. “아내가 늙어가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머뭇거림 없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제 아내는 열일곱 살이었고 지금은 일흔 일곱이니 답할 자격이 있습니다”라며 응답 자격을 확인시킨 남편은 20년 만에 만난 남녀의 대화를 인용하여 답하였다.

남자: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
여자: “무슨, 그 사이 이십 년이나 더 늙었는데.”
남자: “내 시력도 당신 몸과 같이 늙고 있어.”
아내는 예전과 다름없이 젊고 아름다운데 늙어가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늙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내 눈이 여전히 젊다면… 그러나 어디 그럴 수 있나. 서두르지 않아도 세월은 쌓여 눈도 아내도 빠짐없이 쉬지 않고 늙어 가는데.

“그냥 살아 /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늙어가는 아내에게' 첫 연 일부, 황지우)

오늘도 외출 복장을 챙겨주며 최선을 다해 늙어가는 아내가 혹시 이 글을 본다면, 글 속의`아내'를 `남편'으로 바꾸어 읽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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