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2:01 (금)
명예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 명예훼손 고소 안 당하기
명예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 명예훼손 고소 안 당하기
  • 의사신문
  • 승인 2018.09.23 1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2〉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OO병원 가지 마세요. 진료도 대충하는 것 같고 불친절해요.” 의료기관 정보나 육아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글이다.

대부분의 의료기관들은 지역적 평판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위와 같은 평가는 해당 의료기관의 운영에 보이지 않는 손실을 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장님들은 강력하게 대처하였다가 자칫 `긁어 부스럼'이 될까 걱정하여, 참고 참다가 그 커뮤니티 운영자에게 해당 글의 삭제 요청을 하는 선의 대응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글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면, 해당 의료기관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이럴 때에는 `순한' 원장님조차도 명예훼손 고소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다.

“너 고소!”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아 방송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우리나라의 고소율은 세계 최상위급이다. 인근 섬나라의 `100배'이다. 그 중에서도 굶는 건 참아도 무시당하는 건 못 참는 한국인 특유의 자존심과, 한국인 특유의 욱하는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는 명예훼손, 모욕 관련 고소는 해마다 폭증하고 있다.

얼마나 늘었기에? 명예훼손죄 처벌건수는 7년 동안 50%가, 모욕죄 처벌건수는 8년 동안 무려 770%가 증가하였다. 게다가 역시 폭증하고 있는 정보통신망을 통한(=사이버) 명예훼손·모욕죄 처벌건수까지 고려한다면 대한민국은 가히 명예훼손 공화국이다. 명예훼손죄로 실형 복역 중인 전 세계 죄수의 28%가 한국인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어느 경우에 명예훼손이 성립하고 처벌받는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글에서는 대한민국형 범죄라고 불러도 무방한, 명예훼손에 관하여 알아보겠다.

명예훼손죄는 크게 ① (일반)명예훼손죄, ② 출판물 명예훼손죄, ③ 정보통신망 명예훼손죄로 구분되며, 각각은 다시 사실을 적시한 경우 / 허위사실을 적시한 경우로 구분된다. 출판물이나 정보통신망을 통하는 경우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어 명예가 더 크게 훼손될 수 있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가중하여 처벌한다.

어떠한 경우에 명예훼손이 성립하는가? 명예훼손죄의 기본이 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살펴보면, ① 공연히 ② 사실을 적시하여 ③ 사람의 ④ 명예를 훼손하면 명예훼손이 성립한다.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기업, 노동조합, 교회, 향우회 등과 같은 법인이나 단체도 독립적인 명예가 있으므로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죽은 사람도 명예가 있는가? 그렇다. 그렇지만 사실에 근거하여 죽은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막을 필요가 없으므로,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허위사실로 명예훼손하는 경우만 처벌한다. 예전에 서울경찰청장이 `전임 대통령의 사망은 차명계좌의 존재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가 대법원에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 바로 이 사례에 해당한다.

“저는 유명인이 아닌데 저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그렇다. 명예훼손죄에서의 `명예'라는 것은 유명세나 명망, 사회적 존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의미한다. 유명인이나 공인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더라도 누구든지 그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받고 있으므로, 그 평가는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흉악범죄자 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의 얼굴을 모자나 마스크로 왜 가리는 거죠?”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잘 생각해 보자. 만약 부당청구에 대한 환수를 하면서, 국가가 `당신은 부당청구하는 나쁜 사람이니, 당신 재산의 10%를 몰수하겠다'라고 한다면 어떤가? 설령 사람이 잘못하였더라도 잘못한 부분에 대하여만 불이익을 받아야 하고, 이러한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수천 년간 싸워왔다는 것은 전에도 언급한 바 있다.

잘못한 행위와 다른 행위는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하고, 다른 행위 부분은 다른 국민들과 똑같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법의 정신이다. 그러니 연쇄살인범의 살인행위는 처벌하여야 하지만, 그의 명예는 보호받아야 한다. 다만 그 범죄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최근에는 일정한 기준 하에 흉악범죄자의 얼굴이 공개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적시한 것인데 왜 명예훼손이 되는지 묻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였는데 왜 처벌받느냐 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자의적으로 떨어뜨릴 권한은 없다(설령 사실을 말한다 하더라도). 심지어 국가 역시 그렇게 할 권한이 없으므로, 국민의 전과기록과 같은 `사실이지만 숨기고 싶은 사실'을 법적 근거 없이는 국민에게 알리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사실을 알리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와 관계되거나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면, 위법하지 않으므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명예훼손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연성'이다. 다수인 앞에서 말하였거나 다수인이 있는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면 당연히 공연성이 인정된다. 그러면 1명에게만 말하였다면 괜찮은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경우 법원은 불특정인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을 기준으로 공연성을 판단한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보자.

(1) 현숙이가 미영이의 엄마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미영이가 요즘 바람났다면서요?”라고 말하였다면? 미영이 엄마가 자기 딸의 불륜 사실을 남들에게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므로 전파될 가능성이 없어 공연성이 없다. → 명예훼손죄 X

(2) 현숙이가 미영이와 미영이의 부모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미영이에게 “너 요즘 바람났다면서?”라고 말하였다면? 위와 같은 이유로 공연성이 없다. → 명예훼손죄 X

(3) 현숙이는 평소 달자가 입이 싼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달자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달자로부터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미영이가 요즘 바람났대”라고 말하였다면?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불특정인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어, 공연성이 있다. → 명예훼손죄 O

벤자민 프랭클린은 “유리와 도자기와 평판은 쉽게 깨지지만, 결코 잘 고쳐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명예훼손죄는 사람의 평판을 보호하기 위하여 규정된 고전적인 죄목이지만, 개인이 SNS와 같은 정보통신망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 그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는 죄목이라 하겠다.

최근 법조계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 의견이 힘을 얻고 있지만, 한국인의 기질상,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상 쉽게 폐지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의사는 명예훼손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의사는 명예를 지키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