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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살의 인터뷰
일흔 살의 인터뷰
  • 의사신문
  • 승인 2018.09.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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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47〉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인터뷰는 한낮이 지나간 저녁에 시작되었다. 인터뷰 질문자와 마주 앉았다. 대학 재학 중에 등단한 일흔 살의 시인은 주름살, 서녘 노을, 바다 파도 거품 등을 떠올리며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었느냐고 /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 노을이며 파도며 /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 내일에 속는 것보다 /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일흔 살의 인터뷰', 천양희)

시의 형식이지만 굳이 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읽고 느낄 수 있는 글이다. 더구나 시인과 비슷한 나이라면 더 쉽게 느낌을 나눌 수 있다. 

천양희 시인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다.
“나이 들어가는 일은 그저 나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것은 벌도 아니고, 그렇다고 축복도 아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나이 듦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라서, 당신은 눈이 두 개로군요, 당신의 콧구멍은 두 개로군요 하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콧구멍이 네 개가 아니라서, 눈이 뒤통수에 달리지 않아 아쉬운 점은 분명 있다. 그것은 아쉬움에 관한 것이지 안타까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늙어가는 것은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타깝다.”

시인은 늙음에 대한 마음속을 이어서 꺼내 털어 놓는다.
“`내가 몇 살처럼 보이냐'는 질문을 하는 순간 이미 나이 듦에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신경 쓸 만큼 나이든 것이니 굳이 서로에게 묻고 답할 이유도 없다. `당신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정도로 적당히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라고 답하면 그만이다. 물론, 이런 질문이 횡행하게 된 생물학적-사회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외모지상주의가 고작 몇 밀리미터 피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이지만, 세상이 그렇다 보니 손해 보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자존감을 확인해야 한다.”

늙음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음을 `살아있기 위한 힘의 바탕이 되는 목숨이 끊어짐'이라는 사전의 정의를 따른다면 죽는 일은 삶의 힘이 끊어지는 사건이며, 늙음은 힘이 쇠하여 무너져 가는 사건이며 그 사건의 과정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하다. 그 중에서 널리 입에 올리는 시각들을 그 시각들이 집중하는 키워드를 들어본다. 생물학적 시각은 생명, 철학적으론 개체와 주체의 분리, 문학은 영원한 이별, 경제학적으론 쓸모없는 폐물, 기독교적으론 육체와 영혼의 분리 또는 본향으로 돌아가기 등이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줄여 얼마간의 오해를 일으킬 수 있겠지만 죽음의 시각에 따른 가지가지 키워드만큼 늙음의 시각과 키워드도 정말로 다양하다. 다만, 여기선 칠순에 접어든 유명 여류 시인의 늙음 키워드를 이야기 나누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과거의 확장이 미래'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빛나고 보람찬 어제를 치룬 사람은 보다 좋고 나은 쪽으로 변화하리라 기대하고, 힘들고 고생스레 지난날을 헤쳐 온 사람은 그런 나날의 연장이 미래라고 여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일흔 살의 시인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다.`실패하고' `상실하'는 신산한 곡절을 겪고 지내오면서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알게 되고, 천 개의 칼을 본 후에야 명검을 알게 되듯이 천 개의 시를 쓴 후에야 명시를 알게 된다'며 빛나는 시편들을 써왔고 쓰고 있는 노시인의 인터뷰 말미에,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 다가오기 때문'이라는 링컨의 생각에 의지하여, 필자 스스로 즉석 셀프 인터뷰를 해본다.

“지금 어떻게 늙고 계세요?”

“노을은 노을대로 물들어 저물어가지만 내일 또 내일 반복하고, 파도는 밀려와 거품이 되어 돌아감을 쉼 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의 이 늙음은 반복이 없고 더구나 이처럼 `참 좋은 인터뷰'는 반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인터뷰하며 열심히 늙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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