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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을 지우면서
이메일을 지우면서
  • 의사신문
  • 승인 2018.09.1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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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4〉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이번 여름 퇴직하면서 여러 행사와 모임 때문에 바쁘게 지냈다. 퇴임식을 마치고 교수실을 비우기 전에 PC 앞에 앉아 이메일을 정리하기로 했다. 평소에도 스팸이나 사안이 끝난 것은 주기적으로 지워왔지만 아직도 1년에 1000개 정도의 메일이 남아있었다. 모처럼 옛날 주고받았던 내용을 다시 보니 그 속에 내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뜻하지 않게 과거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우선 각종 행사와 회식에 관한 메일이 많았다.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일주일에 3∼4일 정도는 저녁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학교, 교실, 학회, 병원 모임이 대부분이나 친구나 다른 사교 행사도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과연 꼭 필요한 모임은 몇 개인지? 여러 이유와 핑계거리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시간만큼 교수 본분인 연구와 교육에 전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자부심을 느끼는 내용도 있었다. 핵의학 분야에서 우리 팀의 연구 성과와 이에 따른 논문 발표, 새로운 연구과제 선정과 국제학회의 초청 강연…. 대충 세어보니 외국에서 100여 차례나  강의를 하였다. 물론 진료에 관한 메일도 있다. 내가 치료한 환자가 좋아지고 건강해지면 가끔 고마운 마음을 이메일로 표현한다. 대부분은 갑상선암 환자로 수술 후 검사와 약물치료를 평생 계속하면서 마치 친지처럼 보내고 있다.

가장 큰 보람은 나를 따르는 제자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대학에는 의학과(醫學科)와 의과학과(醫科學科) 두 종류의 대학원 과정이 있다. 나는 연구 특성상 자연과학대학 출신인 의과학과 전공 대학원생이 많고 이들과 이메일 왕래가 잦았다. 학문적 일 외에도 인간적으로 내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니 세대 차이는 크게 느끼지 않았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제자들과 이메일로 사랑과 격려를 주고 받고 있다. 특히 제자가 점차 훌륭한 학자와 교수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십 여년 전부터 수필을 쓰는 취미가 생겨 어느새 책으로 5권을 출간했다. 친지, 동료, 선후배, 제자들에게 새 책을 보내면 보통 이메일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내 글이 재미있고 좋았다는 피드백에서 나는 보람과 의욕을 되찾고는 하였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니 독후감이나 진정한 축하가 아닌 립서비스 성격의 내용이 많아 보인다.

이렇게 지나온 인생길을 반추하며 이메일을 정리하니 보람과 회한이 섞여 있었고 당연히 즐거웠고 보람 있고 행복했던 내용들은 지우지 않고 남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보낸 이메일 속에서 우연히 러시아 국민 시인 푸슈킨의 시 한 편을 읽게 되었다. 관광지 기념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나니.

어릴 때 우리 동네 이발소에 이 시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당시는 너무 교훈적이고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으나, 65세가 넘은 나이가 되어보니 시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삶을 살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현재로 다가온 미래는 과거로 변하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면 기뻤거나 슬펐거나, 보람이 남았거나 회한으로 끝났거나, 지나간 과거사는 모두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인생이란 항상 즐겁고 보람 있지 만은 않고, 괴롭고 낙담하는 시간도 내 삶의 소중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아프고 괴로웠던 내용의 메일도 남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으나 싫으나 두 번 다시 갈 수 없는 내 발자취이기 때문이다.
애닯고 낭만적인 시의 마지막 구절을 조용히 음미하여 본다. 삶에 대한 고독한 성찰에서 깨달은 긍정의 감성을 같이 느끼면서.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움이 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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