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59 (금)
의사와 `던바의 수(數)'
의사와 `던바의 수(數)'
  • 의사신문
  • 승인 2018.09.04 0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3〉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나는 이번 8월 말에 대학교에서 정년 퇴직을 하였다. 퇴임 즈음해서는 생각보다 바빠서 힘들었다. 대학과 병원에서 열리는 행사, 교실과 학회 행사 같은 공식 모임 외에도 사적인 모임이 적지않았다. 여기에 대학병원에 40년 이상 의사로 근무했기에 본인이나 가족의 건강 문제로 내 도움을 받았던 친구와 친지들이 연락하고 또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나를 만난 환자나 가족들은 고마움도 표시하지만 그 간의 병력을 이야기하며 현재 상태를 의논하기도 한다. 물론 내가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다. 그러나 너무 일방적인 가정이다. 미안하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과거 상황을 기억하지 못 한다. 나도 치매가 시작됐는지 심지어는 찾아온 지인의 이름도 헷갈리는 상태이다.

한번은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수화기를 제대로 들었을 때는 이미 통성명은 끝나고 그 쪽의 말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말을 반복해 달라고 요청하기가 미안해 내방에서 만나자는 약속에 그저 동의하였다. 며칠 후 찾아 온 친구를 보고 나는 당황하였다. 턱수염을 길렀지만 확실히 아는 얼굴인데 누구인지는 물론 나와 어떤 관계인지 아리송한 것이 아닌가? 암으로 고생하신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다가 잔꾀를 하나 내었다. 최근에 발간한 내 수필집을 한 권 주고 서명을 해 주겠다며 정확한 이름 철자를 물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가 친했던 초등학교 동창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털보 얼굴에서 귀엽고 통통하던 어릴 때 표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정말 미안한 마음에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고, 병원식당에서 점심까지 대접하였다.

다른 의료인들도 모두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큰 병으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일은 세상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병자나 가족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의료인도 당연히 잊지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홀이 여긴다고 간주해 섭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모든 상황을 다 기억하려면 우리 머리가 터지지나 않을까?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는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이다. 그는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가 150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고, 학계에서는 `던바의 수數'라고 부른다. 원시시대 수렵 채집 사회 집단의 평균 규모가 150명 정도였고, 예전 개인 전화번호 수첩에 적은 지인의 숫자가 얼추 150정도 였단다. 지금도 회사에서 150명 단위의 작업반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우리나라 의료인이 진료하고 관리해야 하는 숫자는 휠씬 많다. 보통 의사가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가 50명정도이고, 명의로 알려져 있으면 100명을 훌쩍 넘으니 담당하고 있는 전체 환자는 몇 천명이 넘을 것이다. 의사가 개인적으로 병세를 파악하고 있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이고 병록 차트나 컴퓨터 자료를 보아야 기억해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비교적 환자가 적은 내 경우도 여러 여건 때문에 만족한 진료를 못하고 있다.

던바의 150명은 서로 진솔한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는 범위일 것이다. 그 이상 구성원이 많아지면 자기 속내는 숨기고 겉으로는 조직내 역할에 따라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요즘 유행어인 소위 `감정 노동자'가 된다. 이는 판매, 유통, 음식, 관광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 가져야 하는 태도이지 의료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조건 환자의 감정과 의견에 동조하는 친절한 의료 판매자가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위하여 병자를 교육 격려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전문가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질병에 대한 깊은 의학적 지식과 환자의 처지를 공감하는 정서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진정한 감정의 공유와 교류는 지위의 높낮이에 따른 일방적이 흐름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주고 받으며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의사-환자의 관계도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대부분 평소에 많은 환자에 지쳐 감정에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담당 환자의 병이 악화되면 의사는 자신을 감정적으로 보호하기 의해 마음의 문을 닫고 냉정해 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병자는 문 밖에서 더 추위를 느낄 것이다. 일반인이 의사를 이기적인 자기 보호 집단으로 여기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다.

`던바의 수'는 지속적이고 안정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지의 한계를 정량화한 숫자이다. 우리나라 의료가 한 단계 오르려면, 아니 현재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의료인에게 적용되는 새로운 `던바의 수'를 찾아내야 한다. 더불어 감정적 교류가 가능한 적정 수의 환자 만 진료하여도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너무 이상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건실한 의사-환자 관계를 위한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의료진의 권고에 동조하지 않는 환자와 가족을 이해하고 설득하는 개별적인 경우도 있고, 다소 감성적인 한국인의 성향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의사가 감성적으로 원만하게 진료하고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 환자 수인 `의학적 던바의 수'를 산출해내는 창의적 의학자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