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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위 얼굴
큰 바위 얼굴
  • 의사신문
  • 승인 2018.09.0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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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44〉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큰 바위 얼굴이 바라다 보이는 한 작은 마을에 소년 어니스트가 살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어려서부터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언젠가 마을에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소년도 위인을 기다렸다. 세월이 쌓이며 부자, 장군, 정치인, 시인 등이 마을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모든 사람들은 들떴으나 이내 실망을 하곤 했다.

세월은 꼬리를 이어 덧없이 쌓여갔다. 그리고 어느새 어니스트의 머리에도 서리가 내렸다. 이마에는 점잖은 주름살이 패이고, 양쪽 뺨에는 고랑이 생겼다. 그는 정말 늙은이가 되었다. 그러나 헛되이 나이만 먹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 위의 백발보다 더 많은 지혜로운 생각이 머릿속에 깃들여 있고, 이마와 뺨의 주름살에는 인생길에서 시련을 받은 슬기가 간직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쫓아다니는 명예가, 찾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그를 찾아오고야 말았고, 그의 이름은 그가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을 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저녁 해가 질 무렵, 오래 전부터 늘 해 온 관례대로, 어니스트는 야외에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시인과 함께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팔을 끼고 그 곳으로 걸어갔다. 그 곳은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인 작은 구석진 곳이었다. 뒤에는 회색 절벽이 솟아 있고, 앞에는 울퉁불퉁한 벼랑으로부터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내려와, 바위를 마치 비단처럼 덮고 있었다. 평지보다 약간 높게 푸른 나뭇잎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연스레 만들어진 연단에 올라가서, 따뜻하고 다정한 웃음을 띠며 청중을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설 사람은 서고, 앉을 사람은 앉고, 기댈 사람은 기대고, 저마다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서산에 기울어져 가는 해는 그들의 모습을 비추고, 고목이 울창하여 그늘이 진 엄숙한 숲 속을 향해서도 명랑한 빛을 나누어 주고 있다. 또 저 쪽엔 큰 바위 얼굴이 예나 다름없이 유쾌하고 장엄하면서도 인자한 모습을 짓고 있다.

60세를 산 나다니엘 호손이 46세에 쓴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의 한 부분이다. 어니스트는 연설을 하고 시인은 그 모습을 바라본다.
어니스트는 마음속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은 자신의 사상과 일치되어 있었으므로 힘이 있었고, 자신의 사상이 자기의 일상생활과 조화되어 있었으므로 깊게 실감이 났다. 그의 말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요, 생명의 부르짖음이었다. 그 속에는 착한 행위와 마치 윤택하고 순결한 진주가 그의 귀중한 생명수 속에 녹아 들어간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시인은, 어니스트의 인간과 품격이 자기가 쓴 어느 시보다 더 고아한 시라고 느꼈다. 그는 눈물어린 눈으로 그 엄숙하고 높은 한 사람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 온화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얼굴에 백발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야말로 예언자와 성자다운 모습이라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쪽 멀리, 황금처럼 빛나는 저녁노을 빛 아래 큰 바위 얼굴이 보였다. 그 주위를 둘러싼 흰 구름은 어니스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백발과도 같았다. 그 넓고 큰 자비로운 모습은 온 세상을 감싸 안는 듯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문학평론가들은 `큰 바위 얼굴'은 자연, 신성, 예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자연 그대로 `산 같은 사람', `바다 같은 사람', `하늘 같은 사람', `거목 같은 사람' 모두 `큰 바위 얼굴'의 동류어(同類語)다. 이 모든 동류어는 신성한 전설이 되어 예언을 발한다.

위대한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전설이 되기 위해 살지 않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만족을 채우기 위해 살지 않고, 시인의 외침을 듣기 위해 살지 않는다. 늘 해오던 대로 소박하더라도 평범하더라도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정작 어니스트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정확히 다시 이르면 늙어간다. 그 늙음이 바로 산이고 바다고 거목이고 하늘이고 큰 바위 얼굴이다.

나다니엘 호손은 우의(寓意)`어떤 의미를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빗대어 넌지시 비춤' 작가로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동시대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호손의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나치게 좋은 것만을 소설로 쓴다'고 비판하였고, 반면에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는 `가상과 현실의 접촉'을 훌륭하게 이루어낸 호손의 우의를 극찬했다. 필자는 보르헤스의 평가에 동의한다. 현실의 상당 부분은 생각 또는 판단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가상의 모호함으로 꽤 가득함을 알기 때문이다. 현실은 모호함과 추상적 예견으로 풍요로움과 깊이를 더 해 간다는 사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커질 수 없고 높아 질수 없는 지경이지만 늙음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선물, 멀리 있는 것이 더 잘 보이는 능력, 노안(老眼). 눈앞의 작은 보석이 아니라, 보석과 동류인 그런 것들이 아니라, 창 밖 저 멀리 노을 산을 나날이 더 명징하게 볼 수 있는 이 저녁, 주름 패인 얼굴을 멀리 노을에 비춰보며 가상과 현실의 접촉면에서 중얼거린다. “그래, 내가 나를 닮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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