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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 남은 꽃
시든 꽃, 남은 꽃
  • 의사신문
  • 승인 2018.08.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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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43〉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꽃구경 나섰다가 나도 몰래 노을에 취하여
나무에 기대어 잠든 사이에 해는 이미 저물었네
술 깨니 손님은 다 흩어져 가고 이미 깊은 밤이라
다시 붉은 촛불 밝혀 시든 꽃구경 하네

尋芳不覺醉流霞 심방불각취유하
依樹沈眠日已斜 의수침면일이사
客散酒醒深夜後 객산주성심야후
更持紅燭賞殘花 갱지홍촉상잔화”

중국 당나라 후기 시인 이상은의 `화하취(花下醉)'. 꽃구경 갔다가 취하여 자는 사이에 해가 지고 꽃이 져 잔화(殘花)를 본다는 내용이다. 어렵지 않게 장면이 그려진다. 감상 내내 필자의 관심은 시의 마지막 두 글자 `잔화'의 번역에 쏠렸다. 어떤 이는 `남은 꽃'으로, 또 어떤 이는 `시든 꽃'으로 번역한다. 하버드 대학의 중국문학 교수 스티븐 오언이 `화하취(花下醉)'를 `Drunk Beneath Flowers'로 영문 번역하면서 `잔화'를 `withered blossoms'이라고 한 탓인지 그 이후의 번역은 `시든 꽃'이 많다.

남은 꽃을 구경한 것인가, 시든 꽃을 구경한 것인가. 꽃의, 아니 모든 생물의 마지막 부분은 시든 것인가, 남은 것인가.
중국 베이징 대학 `미학과 미학교육 연구 센터'주임 교수 주량즈는 `시든 꽃'을 다음과 같이 강해한다.

“시든 꽃은 현란한 과거를 지녔고 그것이 거쳐 온 모든 소식을 지니고 있다. 시든 꽃을 감상하는 것은 잔혹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번성으로 현재의 쇠락을 드러내고, 또 현재의 쇠락으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한다. 번성함은 순식간에 가버리고 시든 꽃이 지는 것은 만회할 수 없어 사람들에게 무한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더 나아가서 시든 꽃은 쇠약하지만 여전히 꽃이며, 그것도 최후의 꽃이니 영원한 적막 속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 시든 꽃은 최후의 시간을 나타내는 형상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미래와 하나로 연결시킨다. 시인은 바로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남아 있는 가치'를 살핀다. 이상은의 `다시 촛불 밝혀'라는 구절은 생명의 제의(祭儀)인 듯하다. 이 제의 중에 시인의 완강한 `감상'은 생명을 쇠약하게 하는 힘과의 분투를 표현하고, 사람과 시간의 극도로 긴장된 관계를 펼쳐 보인다.” - (`인문정신으로 동양 예술을 탐하다' 주량즈 저/서진희 역)

꽃에서 잔화(殘花)는 나무에선 산목(散木)이랄 수 있다. 재목으로서 쓸모없는 나무, 쓸 만한 것은 다 쓰이고 남겨진 나무, 쓸모없는 오래된 나무, 추하고 괴이한 나무를 산목이라 한다. `장자'외편에 산목이 나온다.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바로 옆에 나무꾼이 다른 나무는 베어내면서도 그 큰 나무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닌가. 장자가 까닭을 묻자 “쓸모가 없어요(無所可用)”라고 답했다. 답을 들은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감이 못되어 천수를 다 누리는 구나.”

장자는 `인간세(人間世)'에서 산목의 의미를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사람들에게 쓰이기 때문에 베여져 제 몸에 화를 당하고, 기름불의 기름은 밝기 때문에 몸을 불태워야 한다.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나무가 베이고, 옻나무는 칠하는데 쓸모가 있어 잘리거나 찍힌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쓰임[有用之用]만을 알 뿐 쓸모없는 것의 쓰임[無用之用]을 알지 못한다.”

`텅 비고 쓸모없음이나 답답한 서투름이 도리어 생명의 의의를 다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주량즈는 이렇게 주석을 덧대어 적고 있다. `시든 꽃의 “시듦”은 “온전함”을 생각하게 하고 시든 꽃의 “최후”는 “신선함”과 연계된다.'

`시듦'은 모두에게 시간의 경과와 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늙어가며 `시듦'에 의해 환기되어지는 경과와 기억 속엔 희락과 신산(辛酸)의 곡절이 또 다른 즐거움과 고됨을 느끼게 한다. 늙어서 노인이 된 처지인 노경(老境)을 `저무는 지경'이란 뜻으로 `모경(暮境)'이라고도 한다. 늙음을 의미하는 한자 `로(老)'는 `늙을'이란 뜻과 함께 `익숙할'의 뜻도 지니고 있다.

젊은 시절 무르익어 방창한 꽃구경도 나름대로 질펀하게 즐기고 나니 어느덧 노을 따라 모경에 들어섰다. 이제 남은 시간 - 설령 그 시간이 시든 세월로 보일지라도 - 촛불 하나 밝혀 온전히 저물어가는 늙음의 지경을 찬찬히 그리고 대견스레 살피는 신선한 연계의 시작이다. 평생 처음 늙어보는 터라 `시듦'도 `남음'도 처음이어서 서툴 수밖에 없다. 서투름은 재치와 솜씨가 있고 약삭빠른 교묘함과 대척점에 있다.

크게 이룬 것은 모자란 듯 보이고/크게 찬 것은 빈 듯 보이고/가장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최고의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

大成若缺(대성약결)/大盈若沖(대영약충)/大直若屈(대직약굴)/大巧若拙(대교약졸)
- (`노자' `45장' 일부)

서투름의 쓰임에 슬며시 기대어 여전히 꽃으로 노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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