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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너, 지석영 <3>
조선의 제너, 지석영 <3>
  • 의사신문
  • 승인 2006.10.2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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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할 미친 사위

나의 평생으로만 보드래도 과거를 한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온 때와 같은 크나큰 기쁨이 없었던 것은 않았지만은…그 때(팔뚝에 똑똑하게 우두자국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소.” 지석영이 77세 되던 1931년 1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그를 인터뷰했을 때의 소감이다. 일찍이 제너의 스승인 존 헌터는 임질이 매독과 다른 병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매독균인지도 모르고) 임질균으로 보이는 물질을 자기 몸에 주사해 매독으로 죽고 말았다. 당시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이렇게 과감히(?)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25세의 지석영은 부산 제생의원에서 2달 남짓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침과 두묘를 얻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처가에 들렀다. `믿지 못할 미친 사위' 소리를 들어가며 장인을 설득한 끝에 2살박이 처남에게 접종, 1879년 12월 6일 성공을 거두었다.

 

성공의 또다른 주역, 조선정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정약용은 서양의 우두기법을 들여오면서 정부의 탄압을 피하려고 서양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을 삭제해야 했다. 지석영의 종두 학습과 보급이 열매 맺은 것은 국가적인 개화시책의 전개 속에서 가능했다. 개항 이후 정부에서는 서양 각국과 먼저 수교를 하고 변화를 추구하던 청과 일본에 영선사와 수신사·조사시찰단 등을 보내어 신문물을 탐사했다. 일찍이 그의 스승 박영선(朴永善)은 1876년 7월 제1차 수신사행 때 일본에서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가져와 지석영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1880년 5월 김홍집이 수신사로 갈 때에는 지석영이 직접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부산 제생의원에서 미처 못 배운 두묘 제조법은 물론 종두 채취용 송아지를 기르는 법에서 백신을 채취하고 보관하는 방법에 이르는 종두법 전반을 익혔다. 김홍집이 일본 외무경을 통해 요청을 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양의의 스승이 된 한의

지석영은 부친과 교분이 깊었던 중인층 한의학자 박영선의 문하에서 한학과 의학을 배웠다. 그가 받은 면허는 제6호 의생면허. 1913년 의사규칙과 의생규칙이 공포된 뒤 양의(洋醫)들은 의사규칙을, 한의(韓醫)들은 의생규칙의 면허를 받았기에 당시 한의들은 `의생(醫生)'으로 불렸다. 의료인력의 부족 때문에 공식적으로 한의학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근대적인 의사로는 인정하지 않는 조처였다. 지석영은 서양의학의 예방의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종두법을 들여와 보급했다. 또 양의(洋醫)들을 국가적으로 육성하는 의학교 설립을 청원하고 그 교장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양의들의 선배요, 스승이라 할만하다. 서양의학의 도입은 이렇듯 새로운 의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진 조선인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흥기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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