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6 17:18 (화)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법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법
  • 의사신문
  • 승인 2018.08.20 0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2〉

이번 8월말에 서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을 하게 된다. 내가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한 것이 1971년이니 벌써 연건동 캠퍼스에서 47년을 지낸 셈이다. 1978년에 전공의가 되었으니 40년이 지났고, 교수가 되어서는 33년이 지났다. 이렇게 숫자를 세어 보니 너무 오래 있었고 당연히 떠날 때가 되었다.

퇴임 전에 의과 대학생 시절 지도교수인 생리학교실의 김기환 교수님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집안에 아무도 의료인이 없는 나는 의대 생활과 졸업 후 진로 결정에서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한 선생님은 기초의학자로서의 삶을 묵묵히 성실하게 걸어 와 후학의 모범이 되어 왔다. 몇 차례 전화로 독촉하여 어려운 발걸음을 하신 선생님은 정년 선물로 커다란 손부채를 가지고 오셨다. 부채에 `공수신퇴(功遂身退)'라는 글귀를 손수 붓글씨로 쓰셨다. 이 글귀는 노자 도덕경 9장에 있는 `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에서 따온 것이다.

친절하게도 선생님은 도덕경 9장의 전문을 적은 편지도 함께 주셨다.

持而盈之 不如其已(지이영지 불여기이)
퀛而銳之 不可長保(췌이예지 불가장보)
金玉滿堂 莫之能守(금옥만당 막지능수)
富貴而驕 自遺其咎(부귀이교 자유기구)
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득 채우려 하면, 그만 두는 것만 못하다.
갈았는데도 더욱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안에 가득 차면, 그것을 지킬 수가 없다.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으면 교만해져,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을 이루면 몸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다.

노자의 도덕경은 현재 표준으로 인정되는 왕필본 이외에도 서로 다른 판본이 있고 뜻이 애매하고 포괄적인 내용도 많다. 9장도 마찬가지로 각 본마다 조금씩 한자가 다르고 여러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보통은 윗글처럼 병렬적으로 설명하나, 마지막 문장인 `공수신퇴 천지도'를 결론으로 해설하기도 한다.

필자는 9장 전문을 전형적인 기승전결(起承轉結)로 해석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우선 첫 줄은 서론이자 결론이다. “사람은 모든 일에서 자족(自足)하여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욕심 내는 것은 명예와 재물이다. 둘째와 세 번째 줄은 `기승전결의 승(承)'으로 이 경우를 각각 설명한 것이다. “뾰족한 것을 갈아서 더욱 날카롭게 한다.”는 매우 상징적인 표현이다. 사람의 능력, 지위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어떤 능력이 한 방향으로만 지나치게 많아지거나 이에 따르는 명예나 지위가 터무니 없이 높아지면 오래 감당할 수 없다. 그 다음 문장은 반대로 아주 직설적이다. “집안에 재물이 너무 많으면 지킬 수 없다.” 네 번째 줄은 `기승전결의 전(轉)'으로 이 권고를 따르지 않았을 때 생기는 비극적 결과이다. 자기의 분수를 넘는 지위와 재물은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스스로 허물을 만들고 화를 자초하게 한다. 마지막 줄은 결론이다. 따라서 공을 이루면 명예, 지위나 재물을 버리고, 자신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하늘의 도리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선생님은 도덕경 9장의 요점이자 올바른 처신 강령인 `공수신퇴'를 나에게 적어 준 것이다.

김기환 선생님은 내 졸저 〈소소한 일상 속 한 줄기 위안〉에서 이야기했듯이 기초 의학자 그 자체였다. 평생 동안 평활근의 수축 조절 기전을 꾸준히 연구하였다. 분자생물학이 첨단의 기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이 시기에 다소 지루한 전기 생리학 계열의 연구를 계속하기에는 남다른 소신이 필요하였다. 아마도 화려함이 아닌 일견 평범함에서 생명의 진리를 찾으려 했고, 청빈한 기초의학 교수의 삶에 만족하였다. 부와 명예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고 결실을 이루어 정년에 물러났다.

선생님 편지는 축원으로 끝났다. “많은 업적을 남기고 정년 퇴임하는 정 선생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앞으로 노자가 말한 것처럼 `공수신퇴'하여 존경받는 선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선생님이 `공수신퇴' 의 진리를 몸소 보이면서 나에게 권한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진정으로 김기환 선생님은 내 평생 지도교수님이시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