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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전(老前) 정리
노전(老前) 정리
  • 의사신문
  • 승인 2018.08.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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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41〉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유품 정리, 365일 전국 대응, 35,000엔부터. 가족과 따로 살고 있거나, 싱글이 많을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타계 한 후 재산과 신변의 물건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한 노후 생활을 내다보고 시설에 입주하기 전에 신변을 정리하고 콤팩트하게 생활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생전(生前) 정리, 노전(老前) 정리의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특히 판단력도 여유가 있는 생전·노전이기 때문에 고객의 섬세한 요구에 부응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가 생전에 쓰던 물건을 정리해주는 한 일본 회사의 광고 문구다.

미리 어수선하거나 쓸데없는 것을 없애 가지런히 바로잡기를 늙기 전 젊을 때 하는 게 노전 정리이고, 죽기 전 살아 있는 동안 하는 게 생전 정리다. 기력과 체력이 있는 현역 시절에 신변과 생활 방식을 검토하여 경쾌하게 하는 것이 노전 정리의 목적이고, 자신의 사후에 남겨진 가족들이 유품 정리 및 재산 상속 등에 얽혀 곤란하거나 옥신각신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생전 정리의 목적이다. 사후에 남겨진 물품들을 정리해주는 것이 유품 정리다. 시간의 흐름대로 보면 노전 정리로 생활환경을 가볍게 하여 새로운 삶을 마련해 살다가 생전 정리하고, 세상을 뜨면 유품 정리를 한다.

`노전 정리'는 사카오카 요코(坂岡 洋子)가 만든 용어다. 1957년생인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장애인을 포함한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는데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인 장애나 정신적인 장벽을 제거하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활동'을 해온 작가다. 그러던 중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생활을 조화롭게 하자'는 이른 바 `단사리(팄捨離)' 열풍이 몰아치는 시기에 마침 그녀는 재택 간호 현장에서 거의 모든 노인의 집에 물건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그때에 사카오카 요코는 늙기 전에 소지품을 정리하는 노전 정리를 생각해냈다. 그녀는 실감한 체험과 생각들을 꾸려 `늙은 부모는 떠나라', `노전 정리', `넘어지기 전에 노전 정리' 등의 책을 펴내며 `노전 정리'를 주창하고 있다.

노전 정리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정리하고 나면 청소가 간편해져서 즐겁고, 그때 그때 필요한 물건을 찾는 시간이 절약되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어 내 안팎의 소통이 늘어나면서 소비의 패턴도 건전하게 바뀐다. 바꾸어 이르면, 노전 정리는 노후의 부담을 줄여 줄뿐만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제2의 인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노전 정리는 언제 하는 게 가장 좋은가? 늙고 나면 체력이 떨어지고 몸이 불편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예를 들면 늙어갈수록 집안에서의 이동을 비롯한 활동 반경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 변화에 맞추어 활동이 편하도록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도 노전 정리의 하나다. 늙기 전에, 쓸 가구 정도는 마음먹은 곳으로 거뜬히 옮길 힘이 있을 때인 40대 무렵에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힘이란 상대적인 것이므로 `조금이라도 더 늙기 전' 지금이 바로 `노전(老前)'이다.

노전 정리의 핵심 실행은 노후에 사용할 것을 중심으로 남기고 다른 것을 처분하는 것이다.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물건을 남겨두면 정리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왜?” “언제?” “누가?” “어떻게?”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아직 충분히 쓸 만하더라도 사용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여겨지면 버린다. `사용할 수 있다'와 `사용하고 있다'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걸 사사오카 요코는 `자신과 물품의 관계를 명확히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는 `한 번에 정리하려고 하지 말라', `처음부터 완벽을 목표로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그 장점과 방법을 익히더라도 막상 버리는 건 쉽지 않다. 사사오카 요코의 경험에 따르면 정리하기 가장 어려운 건 책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책을 버리는 문제는 인생의 숙제'라고 까지 표현한다. 당장 수긍이 간다. 버릴 목적으로 구한 책은 없다.

책마다 사연과 의미와 가치와 추억을 담고 있다. 어떤 책은 나름대로 여러 번 생각하고 버렸다가 불가피한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다시 구입한 적도 있다. 책을 버리는 데에 정해진 방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 추억을 포함한 감정과 기준에 따라 몇 번이고 망설이기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버리는 게 쉽지 않아 사사오카 요코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도서관에 기증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옛날에 읽었던 책보다는 새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고 한다.

노전 정리. 미리 정리하여 산뜻하고 단출하게 더 늙은 내일의 늙음을 맞이하고 겪고 바라볼 수 있으면 그것이 흔히 일컫는 제2의 인생일 게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끌어안고 사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극복하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더 늙음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몸소 실천하여 새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다름 아닌 `늙을 용기'의 당연한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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