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59 (금)
5월의 한라산 돈내코길<2> <27>
5월의 한라산 돈내코길<2> <27>
  • 의사신문
  • 승인 2010.06.16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철쭉
한라산에서 백록담까지 유일하게 열려 있는 길은 성판악코스입니다. 진달래대피소를 지나 바위 길이 시작되면 바람과 돌과 탁 트인 전망이 함께 어우러진 한라산 길의 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백록담을 보고나면 다시 성판악으로 내려오기 보다는 관음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길이 아기자기하고 예쁩니다.

돈내코 길은 백록담까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한라산 남벽 아래까지 가서 다시 되돌아오든지 아니면 윗세오름 휴게소까지 계속 가든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다시 영실 방향으로 내려갈지 어리목으로 내려갈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영실로 내려가는 길은 어리목길 보다는 조금 더 가파르지만 짧습니다. 대신 영실 관리사무소에서 버스타는 곳까지가 꽤 멉니다. 어리목에서 버스길까지는 긴 산행 후라도 거의 부담이 없는 거리입니다.

15년 만에 개방된 돈내코 길은 조용합니다. 인적조차 없습니다. 서귀포 앞바다를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숲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았는데 밀림 입구라는 표지석이 보입니다. 800 미터를 왔습니다. 이제부터 울창창한 숲길로 들어섭니다. 무성한 나뭇잎이 해를 가려 가져간 선글라스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어둑어둑한 길을 땀을 흘리며 걸었습니다. 길옆으로 선홍색의 꽃이 흩어져 있습니다. 오래전 여수에서 보았던 동백꽃이 생각났습니다. 땅 위에 떨어져 굴러도 예쁜 꽃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저 꽃은 예쁩니다.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보니 철쭉인 듯합니다. 저 위 높은 곳에 붉은 꽃이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키 자라기에서 밀리면 끝이니 어떻게 하든 다른 나무가 자라는 만큼은 자라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남아 철쭉은 저 위 높은 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단체여행객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로 소란스러운 성판악 길이 저잣거리라면 여기는 구절양장 깊은 산속의 절집 마당일 듯합니다. 들리는 소리라곤 내 발자국소리와 숨소리뿐입니다. 참으로 적막한 길입니다.

땅 위에 떨어진 철쭉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불현듯 적막함이 사라집니다. 저 숲속 어딘가에서 새들이 속살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들려오는데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걱정 없이 잘 살아온 이 숲에 나타난 침입자 때문에 새들이 놀란 것이 틀림없습니다. 새들은 그렇게 몸을 숨기고 적당한 거리에서 계속 나를 따라왔습니다.

등산로는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곳곳에 밧줄로 길 안내를 하고 있고 해발 100 미터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몇 번 땀을 훔치며 밀림 입구에서 1 킬로미터쯤 더 올라 `썩은물통'이라는 표지석을 발견했습니다. `돈내코'나 `썩은물통'이나 참으로 생소한 이름입니다.

몇 걸은 더 올라가 비로소 `썩은물통'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거기에 작은 늪이 있었습니다. 나뭇잎과 꺾인 나뭇가지가 떨어져 썩는 한쪽에선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생물들이 터를 잡고 있었습니다. 기거나 걷거나 또는 날아다니는 곤충과 새와 산짐승이 이 물통의 주인입니다. `썩은물통'은 한 생명이 다하는 곳이기도 하고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