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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심과 진학 지도 수업
애교심과 진학 지도 수업
  • 의사신문
  • 승인 2018.07.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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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0〉

우리 학창시절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까지 모두 입학시험이 있었다. 따라서 초등학생,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고학년이 되면 소위 `명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입시 공부를 하였다. 모든 학교가 입학 성적에 의하여 순번이 정해졌고 학생들의 자질도 이에 따라 등급화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현실이었다.

몇 달 전 동창 친구들과 저녁 회식을 하고 지하철로 귀가하던 때였다. 옆자리에 붙임성이 좋아 보이는 내 또래의 신사 분이 앉아있었다. 나에게 말을 건네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출신 학교를 물어왔다. 내가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자 그는 우리 학창시절 7번째로 좋은 학교였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순서를 정했는지는 모르나 이런 서열 매김을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나는 일부러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라고 반발하였다. 그와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서로 주장을 하였고, 결론 없이 헤어지면서 그는 웃는 얼굴로 나에게 애교심도 좋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하시라고 충고까지 하였다.

왜 우리는 이렇게 출신 학교, 특히 중고등학교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을까? 대학생 시절에 어머니에 대한 심리학적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교수님 말씀이 모든 사람은 자기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단다. 그 이유는 아기 시절 엄마 얼굴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젖이나 우유를 먹기 때문이다. 즉, 신체 성장에 가장 필요한 음식을 먹을 때, 기본적인 욕구인 배고픔을 해결하면서 엄마 얼굴을 보니 자연히 웰빙 센스와 동일시(同一視)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춘기인 십대 나이에 정신적으로 성장해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동안 윤리관과 초자아가 형성된다. 많은 경우 이때 받은 학교 교육이 가치관과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어 무의식 중에 서로 연결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출신 학교를 모교(母校)라고 부르고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친형제처럼 중고등학교 동창은 정신적 혈육이 된다. 명문학교 진학을 선호하는 이유도 우수한 동창들이 이러한 유대감으로 사회생활에서 서로 돕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중앙 학교는 1908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교육으로 조국을 살리려는 애국지사들이 설립하였다. 외국인이나 서양 종교단체, 또는 일제가 아닌 순수 민족 지도자의 뜻을 민족자본이 받들어 재정적으로도 건실하여 충실한 전인교육이 가능하였다. 웅원(雄遠, 높은 이상), 용견(勇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의 교지는 학생들 의식에 내재화되어 일제 강압기에는 항일운동의 온상이었고, 지금은 많은 졸업생들이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근간이 되고 있다. 나 역시 이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얼마 전에 모교에서 학생 진학 진로에 관한 강의를 부탁 받았다. 110년 전통에 자립형 사립고등학교가 된 우리 학교는 각 분야의 선배들이 자원하여 한 달에 두 번씩 이런 강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정년퇴임을 앞둔 나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여 수락하였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저명한 국어학자이자 선배님이신 이희승 선생님 강의를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에게 할아버지 뻘이 되는 선생님은 작은 목소리로 “이제는 넓게 everything을 공부하던 사람에서 깊이 있게 one thing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셨다. 교양인이 되고 나서 전문가가 되는 공부의 순서를 다르게 표현하신 것이다.

이제는 내가 같은 할아버지 졸업생이 되어 40여 명의 고등학교 1, 2학년 후배들에게 의학에 대한 진로 지도 강의를 하였다. 의료인의 마음가짐과 전문의까지의 긴 수련 과정을 내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다. 또한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창시절 나의 공부 과정을 같이 회상하였다. 내가 서울의대 교수이지만 처음에는 공부가 쉽지 않았고 여러분과 똑같이 힘들어 하면서 학습 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어려웠지만 꾸준히 하니까 성적이 오르고 힘든 시기를 넘기자 positive feedback이 생겨서 나중에는 배우는 것이 즐거워 졌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2008년 `녹색형광단백질 발견과 개발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과학자들의 고난과 노력, 협력과 vision에 의한 성취 등을 실례로 들려 주었다.

강의 후 의외로 학생들이 많은 질문을 하였고 같이 사진도 찍고 헤어졌다. 다음 날 한 학생이 나한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강의를 들었던 학생입니다.
선배님 강의를 통해서 공부 자체가 아닌 삶의 방향을 찾게 된 것 같아 너무 보람을 느꼈습니다. 올해 퇴임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이바지해주신 점이 후배로서 매우 자랑스럽고 본받고 싶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제 꿈은 의사가 아닌 교사가 되는 것이지만 꼭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에 들어가 우리나라 교육 발전에 기여하는 훌륭한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좋은 강의를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나는 편지 내용도 좋았지만 간략하게 기승전결(起承轉結)에 맞추어 글을 쓴 능력에 감탄하였다. 역시 내 후배라고 기특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애교심으로 맺어진 혈육의 정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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