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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의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이유 :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에 관한 연구
살인사건의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이유 :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에 관한 연구
  • 의사신문
  • 승인 2018.07.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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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3〉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많은 사람들은 20여 년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한국판 OJ 심슨 사건이라고 불렸던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과의사였던 남편은 1995년 은평구 불광동 자신의 집 거실에서 치과의사인 아내와 심하게 다툰 뒤 아내와 2세 된 딸을 목 졸라 숨지게 하고 범행은폐를 위하여 집에 불을 지른 혐의로 기소되었다.

제1심은 유죄를 인정하고 남편에게 사형이 선고하였다. 남편은 항소하였고, 항소심은 제1심을 뒤집고 남편의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검사가 상고하였는데, 대법원은 항소심의 심리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파기환송하였다.

다시 재개된 항소심은 심리 끝에 다시 남편의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검사가 다시 상고하였는데, 대법원이 2003년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형-무죄-파기-무죄-확정이라는 법원의 판결을 거치면서 무려 8년 만에 남편의 무죄가 확정된 것이다.

이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의사라는 점에서 사건 당시에 엄청난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최종적인 법원의 판단 이후에도 그 판결에 대하여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남편이 유죄라고 믿는 사람들은 담당판사에 대한 심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잠시 방론이지만, 왜 판사들은 가끔씩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 판결들을 선고할까? 사람들의 쉬운 말대로 판사가 돈을 먹었거나, 공부만 해서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이 말은 판사가 악당이거나 바보라는 말인데, 모범생이고 공부벌레였던 판사가 악당으로 변하거나, 1년에 몇 백 건(대법관은 1인당 1년에 몇 천 건이다)의 유사사건을 처리하는 판사가 물정을 모르는 바보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판결들이 선고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형사소송의 대원칙'이다.

국민(=피고인)은 원칙적으로 죄가 없다고 추정되고, `국민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국가는 자신의 권한인 형벌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책임은 국가(=검사)에게 있다.

왜 이렇게 국가에게 어려운 책임을 지웠을까? 관아에 잡아다 옥에 집어넣어 놓고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호통치면 `억울합니다. 저는 이래저래 하여 죄가 없고…'라고 빌어야 하는 동양의 사또재판이나,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강에 던진 뒤에 무고하다면 떠오를 것이라고 말하는 서양의 마녀재판이나 종교재판을 떠올려 보자. 죄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도 어렵지만,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더 어렵다. 나아가 평범한 국민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를 상대로 무죄를 증명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그 국민이 못 배우거나 돈이 없다면(대부분은 여기에 해당했다) 이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것을 극복하고 국가의 형벌권 행사를 제한하는데 5000년이 걸렸다.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

그러면 국가가 국민의 유죄를 충분하게 증명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될까? 유죄를 증명할 책임은 국가에 있으므로, 국가가 충분한 증명을 하지 못하는 때에는 그 국민을 처벌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이다. 의심스러운데 풀어주는 것이 찜찜한가? 의심스러우면 전부 처벌하거나, `사또 마음대로' 처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다시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으로 돌아가서, 그러면 왜 법원은 검사가 외과의사 남편의 유죄를 충분하게 증명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였을까? 남편이 오전 7:00경 집을 나온 사실, 오전 8:05경 양천구의 자신의 병원에 도착한 사실, 오전 8:50경 집에 화재가 발생한 사실은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는 범행시각(모녀의 사망시각과 화재의 발화시각)이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검사는, 남편이 오전 7:00 이전에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범행시각을 은폐하기 위하여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그 시신들을 물에 담근 다음, 서서히 불에 타오르게끔 장롱에 불을 지른 뒤 출근하였으며, 밀폐된 방 안의 장롱 속 옷가지에 불을 붙이면 창문 밖으로 연기가 새어나갈 때까지 2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변호인은, 검사의 범행시각 추정은 불확실하고, 제3자에 의한 범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양측 주장만을 살펴보면 검사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게다가 피고인은 시체의 체온이 떨어지는 시각을 역산하여 사망시각을 추정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의사가 아닌가! 심지어 심리생리검사(흔히 거짓말탐지기 검사라고 한다) 결과 남편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나왔다.

그러나 변호인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판사가 범행시각에 관한 검사의 추정이 불확실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 첫째는 사망시각 추정에 있어서 세계적 권위자로 불리는 법의학자인 스위스 로잔 대학 토마스 크롬페처 교수를 증인으로 신청하여 “시신 상태로는 사망시각을 정확하게 밝히기 어렵다”는 증언을 이끌어 낸 것이다. 둘째는 사건 당시와 동일한 조건을 조성한 모의 화재 실험을 실시하여 불을 놓은 지 5∼6분만에 창문 밖으로 연기가 새어나가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최종적으로 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을 모두 종합하더라도 이 증거들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남편을 유죄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가 계속 마음에 걸리신다면, 거짓말탐지기 검사는 질문 방식과 내용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어 법원에서도 참고자료로만 사용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겠다. 참고로 거짓말탐지기 검사는 당사자가 거부하면 강제할 수도 없다.
법원의 최종 판단에 수긍하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위 사건이 형사소송의 대원칙에 따라 판결된 사건임은 분명하다. 살인사건의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이유, 이제 납득이 가시리라 생각한다.

마지막 팁 한 가지, 의료과실 여부가 문제되는 민사/형사사건에서 법원의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는 것은 프로토콜의 준수 여부이다. 프로토콜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면, `책에 써 있는 대로 했는데 뭐가 잘못이냐!'라는 초등학생 같지만 가장 강력한 항변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하여는 의학에 무지하고 수많은 사건들의 처리에 쫓기는 판사가 의학 교과서와 논문의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번역(?)하여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고, 번역과 판사 설득의 전문가인 변호사의 조력이 필수적이다.

다음 회에서는 의사들을 괴롭히는 방문확인/현지조사에 대한 현명한 대처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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