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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쥬스/러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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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8.07.16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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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외과 의사의 영화 이야기 〈1〉


 

이 형 중한양대병원 신경외과

이번호(제5278호, 7월16일자)부터 한양의대 신경외과 이형중 교수의 ‘신경외과  의사의 영화 이야기’를 월 1회 연재한다.
지난 10년간 한양대의료원 소식지에 `Dr. 이형중의 영화 이야기'를 연재해 온 이형중 교수는 의사신문에서 연재할 `신경외과 의사의 영화 이야기'에서도 최근 흥행작부터 예술영화의 해석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 낼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당부한다.〈편집자 주〉

 

서스펜스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대니 엘프만의 빠른 템포 음악과 함께 카메라는 울창한 침엽수로 뒤덮인 산을 넘어 전형적인 미국의 교외 주택가를 훑고 지나간다. 자동차, 나무땔감, 전신주, 가로수를 지나 낮은 언덕에 외로이 서있는 주택에 멈춘 카메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택 지붕을 뒤로부터 서서히 오르는 커다란 거미, 그리고 거미를 거머쥐는 손바닥. 그렇다. 이 모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이며, 팀 버튼의 영화 〈비틀쥬스, 1988, 사진〉는 첫 장면부터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다 진실은 아님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귀신을 속이고, 귀신을 놀라게 하는 반전의 연속. 우리의 시청각은 감각에 반응하지만, 실은 그 실체의 모습이 아닌, 상상을 통해 개개인의 맥락(context)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해석 작업을 할 따름이다. 맥락은 그래서 무섭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 입구를 뒤로 한 채 안쪽만 보도록 손발이 묶여버린 죄인은 등 뒤의 횃불을 통해 앞에 비춰지는 그림자만 보고 살아가게 된다. 그가 보고 듣는 것은 실체가 아닌 상상 속에서 구현된 시커먼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는 이 점에서 영화와 기가 막히게 닮아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관객석 뒤쪽의 슬라이드를 통해 앞으로 비춰지는 화면이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시청각 자극이란 점과, 내용적인 면에서는 극영화에서의 내러티브 구조를 위해 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의 평균화된 캐릭터의 모습을 투영한다는 점에서 동굴 밖 이데아와 동굴 내부의 현세를 연결시키는 실존적인 동시에 현실을 뛰어넘는 허구의 오브제라고도 할 수 있다.

1911년 카누도는 영화란 기존의 시,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무용과 분리되는 독창적인 제7의 예술로서 고유한 영역을 지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투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영화란 그림이나 조각처럼 고유의 물성을 지닌 개체가 아닌, 사진처럼 예술품 본연의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복제예술의 시각으로 봐야만 한다. 따라서 매체의 특성을 주목한다면 평균치의 인물이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의 갈등과 해소의 국면으로 읽힐 수도 있다.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에 의해 최초 제시된 통섭(統攝, consilience)이란 개념은 `더불어 넘나듦(jumping together)'이란 말로 짧게 정의된다. 다시 말해 통섭이란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지나친 과학적 방법론 때문에 사물이 미분화, 파편화되어 정작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맥락 밖에서 고유한 존재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서구 과학지상주의의 르네상스적 환원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빛의 속도로 축적되는 과학적 증거물은 수용자를 가학적으로 질식시키고 있으며, 앞만 보면서 좁고 깊은 의료라는 샘물을 파헤쳐야만 하는 전통적 컨벤션 내에서 임상의사란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만 보고 사는 죄인의 숙명에 다름 아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이라는 동시대적 사상에 반등하여 해체와 구성을 반복하던 변증법적 포스트모더니즘이 창궐한 지 한참 지났지만 의료계, 특히 고도로 정밀한 신경계를 다루는 신경외과 의사들 사회에서 정통을 벗어난 속칭 이단을 용서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대학 정심장(大學 正心章) 편 `심부재이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란 글은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는 뜻이다. 이 중 `시청과 견문'은 열린 눈으로 보고 뚫린 귀로 들어야만 세상을 독창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에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불신이 생기는 것이리라. 이러한 인지적 한계는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이미 입증한 바 있다.

영화를 포함한 비일상적 오브제에 굳이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전율해야 할 필요성과 전문적 비평가의 담론에 본인의 감정을 공명시켜야 할 당위성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 똑같이 신경계에 문제가 있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들의 맘을 헤아려 보는데 왜 신경정신과 의사들만 유기체의 신비에 관한 인문학적 성찬에 초대를 받는 것일까. 피를 보며 뇌를 직접 만지는 신경외과 의사로서는 의문이 생길 따름이다. 유목민의 삶을 지칭하는 `노마디즘'은 텍스트에 의존하던 일방통행적 사고에서 벗어나 영상과 음향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작이 끝이요 끝이 시작이며 중간은 어떤 방향으로도 전환할 수 있다는 디지털적인 `인터메조'의 의미로도 통용된다. 마음을 활짝 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호접몽(胡蝶夢)이 선사하는 부운(浮雲)의 메타포어를 체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환자이름이 케이스의 일련번호(물론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익명처리는 끝난 상태다)로 치환되어 수술 소견이 개체의 특징을 구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환자와 보호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내 관심을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병록번호로 PACS에서 찾게 되는 환자에게도 자명종 소리에 `10분만 더'를 갈구하고 카페라테를 즐기며 백화점 할인기간을 놓친 것에 아쉬워하는 그런 병원 이전의 일상의 삶이 있었음은 의사들은 종종 neglect하게 된다. 뇌혈관외과 전문의로서 나는 그들에게 그런 소소한 일상을 돌려주고 싶으나, 그들의 삶에 중요하게 각인되는 인물이 아닌 단지 스쳐 지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은 단지 바람에 지나지 않음을 느낄 때 간혹 절망하게 된다.

새벽 5시45분 사망한 25세의 여자 백혈병 환자가 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아직 아기도 없는 신혼이었다. 망인에 대해 의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비틀즈와 모차르트를 사랑했고, 주인공 올리버를 사랑했다. 〈러브 스토리, 1971〉는 신파, 그것도 매우 진부한 최루탄 영화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는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사람이 떠나는 일 역시 엄청난 일임을 말한다. 차트에 적힌 영상에 보이는 객관적 자료가 환자(한 사람)의 전부는 아닐 텐데 나는 자꾸 눈가리고 아웅하고 있다. 그리고는 변명한다. 고쳐야 한다.영화 그리고 사람,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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