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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景慕宮)과 JP
경모궁(景慕宮)과 JP
  • 의사신문
  • 승인 2018.07.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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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9〉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뒤쪽으로 의학도서관과 기초 의과학관 사이에 녹색펜스로 구분된 사각형의 유적자리가 있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의 옛터이다. 한편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2인자인 김종필(JP) 전 총리가 며칠 전에 사망하였다. JP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무궁화 훈장 추서에 관한 의견 차이가 있었으나, 젊은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매일 옛 경모궁터를 지나면서 출퇴근하는 나는 이 두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교훈과 지혜를 생각해 본다.

사도세자의 부친인 영조는 조선 21대 왕으로 탕평책을 쓰고 군제와 경제를 개혁하는 등 현명한 군주였으며 가장 오래 산 왕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조 왕의 평균수명은 46세라고 한다. 즉 왕세자가 20대가 되었을 때 선왕은 돌아가시니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영조는 82세까지 권좌를 지키고 있었으니 왕세자는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사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된다. 여기에 양쪽 세력으로 갈려진 신하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여기에 영조는 아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대리청정(代理淸淨)하다가 잘못한다고 철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당연히 증폭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렵게 자수성가한 집권자들은 자기의 권력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영조는 무속인 후궁의 자식으로 왕세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성격이 활달하여 무술을 익히며 말을 타는 것을 즐겨 했다고 한다. 자기의 과거와 비교하여 쉽게 왕세자가 된 아들이 학문보다는 무예를 선호하는 것이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신하들의 갈등에서 왕세자를 비난하는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진실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기가 있는 왕세자가 백여 명의 사람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 영조는 이를 이유로 하여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우리나라 왕조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마침내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였다. 정조의 첫 번째 어명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시키는 것이었다.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붙이고 창경궁 옆 함춘원 동산에 사당을 지어 경모궁이라 하였다. 자신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처소를 지금 창경궁 옆 서울과학관 자리에 마련하여 아버님의 사당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참고로 경모궁의 정문을 함춘문(含春門)으로 이름 붙여 `함춘'은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닉네임이 되었다.

JP는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군부세력의 행동 대원이자 주축이었다. 불과 1년 전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정부가 정치적으로 부재하고 사회 경제적인 혼란을 야기시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군 내부 인사에서 응축된 불만이 원인이었다고도 한다. 정변 초기가 성공적으로 지나자 박정희 장군은 장도영 참모총장을 제거하여 1인자가 되고 처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 중령은 점차 제2인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중앙정보부를 신설하고 공화당을 창당하여 각각 정보부장과 당의장을 맡아 집권세력을 다지고 일본과 외교를 시작하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보이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인기도 얻었다.

집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JP를 점차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왕조사에서 배웠는지 이를 눈치챈 JP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외국여행을 하고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그 후 공화당 정권이 위기에 있을 때마다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해결하면서 2인자로서 영화를 누리지만 절대 그 위 자리를 넘보지 않는 독특한 처세로 일관하였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소위 3김시대가 열렸으나 결국은 김영삼, 김대중 만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오히려 이들을 도와주고 그 휘하에서 2인자로 자족하였다. 1980년 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때 부패정치인으로 수감되었으나 당시 2인자인 노태우 장군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자유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독재자의 특성은 자기가 고생해서 얻은 권력의 힘을 결코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2인자는 영원히 역사에서 저평가 받고 마침내는 잊혀진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명제에서 어느 조합의 선택을 하는지는 자신의 몫이고 이에 따라 삶의 양식과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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