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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맞이 한 후배에게
환갑을 맞이 한 후배에게
  • 의사신문
  • 승인 2018.06.1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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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8〉

*다음은 환갑이 된 절친한 후배 교수에게 보낸 마음의 편지이다.

우선 건강하게 환갑(還甲)을 맞이한 것을 축하합니다. 환갑은 “갑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음력 간지干支가 다시 돌아오는 해인 예순 살을 이르는 말입니다. 간지에는 날 수를 세는 10개의 천간天干(갑, 을, 병, 정….)과 달 수를 세는 12개의 지지地支(자, 축, 인, 묘….)가 있어 조합을 하면 60개가 되는데, 해마다 하나씩 붙이니 60년 후에는 출생한 해의 간지와 동일해 집니다. “70살을 사는 사람이 옛날부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는 말처럼 과거에는 목숨이 짧아서 환갑만 살아도 큰 경사로 여겼으나,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은 오늘날에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동양의 세계관에서 간지는 우주만물이 순행하는 주역의 기본 단위로 환갑은 그저 60번째 맞는 생일이 아니라 간지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가는 시점입니다. 즉, 다른 삶의 길을 시작하는 셈이지요. 공부에 비유하면 환갑을 지나면 배웠던 것을 다시 학습하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 그간의 실패와 성공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공부하며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계기가 됩니다.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자 철학적 예술가로 인정 받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사람이 딱 한번만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진실되고 진지해 질 수 있을까요? 가령 한 번 죽고 두 번째 사는 인생을 상상해 봅시다. 우리의 삶을 에워싼 그 많은 부질없는 것을 걷어내는 시기가 되겠지요.” 환갑을 맞았다면 마땅히 지난 삶을 정리하여 앞날을 새롭게 계획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60번째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게 됩니다. 이십 년 전에 서울대 인문대학 H교수가 쓴 〈나의 오십자술五十自述〉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어요.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개인 사와 학교생활을 진솔하게 기술하여 독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오십자술이란 나이 50세가 되면 자기 인생을 정리해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논어에 이 구절이 있다고 했으나, 술이편述而篇에 “50세에 `주역周易'을 배울 수 있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을 뿐 정확히 같은 구절은 찾지 못했습니다. 주역에는 길흉, 흥망 성쇠와 진퇴 존망의 이치가 있으니 이를 깨달으면 세상살이에서 잘못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그때보다 엄청나게 길어졌으니 공자가 지칭한 50세는 지금은 60세나 70세에 해당 됩니다. 공자님이 노년에 즐겨 읽은 책이 주역이란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요즈음 나도 H교수를 흉내 내어 조금씩 지난 생활과 내 생각을 글로 적어 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 때에는 집 앞에 무심하게 서있던 나무들이 다시 보이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여겨질 것이다.”라는 자코메티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생각이 짧은 나이지만 지난 날과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 생각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보고인 책 속에 이런 지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한정된 시간 동안 만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자연과 우주에서 얻은 모든 깨달음이 저장되어 있는 정신적 DNA이기 때문이지요. 책을 읽는 것은 잠자고 있는 이 유전자를 활성화하는 길입니다. 글을 통해서 저자와 독자가 삶의 진실과 지혜를 공유하고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당연히 젊을 때보다 인생 경험이 더 많아진 나이에 독서를 하면 글쓴이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공자님도 `주역'을 어찌나 자주 읽었던지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모자라 “이렇게 몇 년 더 공부하면 `역'에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스승인 공자님도 세상 이치를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웠는데 평범한 우리는 더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은 환갑이 되는 날에 만 국한되어 그 때를 기다려 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다시 자코메티의 말로 이 편지를 끝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죽고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는 환상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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