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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노화(向老化)
향노화(向老化)
  • 의사신문
  • 승인 2018.06.0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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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32〉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늙음에 검질기게 맞서서 대항하여 젊음을 유지하려는 항노화(抗老化)와 다르게 해를 바라는 해바라기처럼 늙음을 향해 바라 늙음을 받아들여 슬기롭게 즐기는 자세가 향노화다. 1999년 자원봉사를 하던 일본 여성 다카하시 마스미(高矯眞澄)의 생각에서 비롯된 개념이며 활동이다. 그녀는 당시에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오랫동안 뒷바라지하면서 늙음에 대한 기존 사고의 비현실적 허전함을 깊이 깨달았다. 지금은 `일본향노화학회'도 결성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향노학이 무엇인지를 되도록 본디 의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일본향노학회 설립취지문을 번역하여 옮긴다.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에서 이미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장수국이 되고 있다. 실제로 구미 선진국에 비해 무려 3∼4 배의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바뀌었고 눈앞에 `초고령 사회'를 앞두고 있다. 바로 유사 이래 초유의 사회 격변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미래 사회의 도래를 내다보며, 오늘날, 다가오는 초고령 사회에 대응하는 여러 연구·대책을 다양한 관점에서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제반 연구-대책의 결과들은 행정이나 민간 차원에서 이미 여러 정책과 활동을 통해 실천되고 있고 그 자체로 매우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개인에서는 `고령기', 사회 전반에서는 `고령인구층' 등과 같이, 초고령 사회를 고찰하는 기본 틀과 문제의 소재를 살피고 파악할 때에`고령'이라는 어휘에만 매달리지 않고 “삶 자체를 늙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초고령사회를 다시 살펴볼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이처럼 `고령기·고령인구층' 등에 머물지 않고, 라이프 프로세스 자체를 연구·실천 대상으로 하는 향노학은 `인간이 그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계에서 개개인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회 구축'을 궁극적 목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 체계를 가진 사회의 구축을 희구할 때 특정 세대의 과도한 부담으로 초고령 사회가 구축되는 것을 피하고 모든 세대에 상응하는 부담을 할당하여 균형 잡힌 사회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즉 향노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생활하고 늙어가는 일상성 자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학제적 측면을 강하게 내포한 향노학은 사회 과학의 여러 영역에서는 물론, 인문 과학, 자연 과학 등과의 적극적인 조화·융합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에 없던 독창적 연구·정책 제언을 할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 프로세스를 통한 존엄 있는 사회, 나아가서 `활력 있는 초고령 사회'를 구축하는 가치 체계를 실현하기 위해 여기에 일본 향노화학회의 설립을 선언한다.”[일본 향노화학회 설립 취지서, 1999년 10월 1일]

향노는 늙음의 수용에서 시작한다. 긍정도 대처도 진정한 수용에서 나온다. 우리 주변을 온통 에워싸고 있는 항노화를 포함하여 노인학(또는 노년학, 노인을 연구하는 학문)에선 늙음과 노인이 연구 대상인 객체이지만 향노와 향노학에선 늙음과 노인이 그 늙음을 경험하고 그 노인이 바로 당사자인 주체이며 연구자가 된다. 이러한 차이는 노인문제와 노후문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다름과 유사하다. 즉, 노인문제는 노인을 대상 또는 객체로 보는 관점인데 반하여, 노후 문제는 노인 스스로가 노후를 맞는 주체적 관점을 갖는다. 향노학은 노후의 시각에서 늙음과 노인 그 자체를 문제로 여기지 않고, 늙음과 노인 그 본체를 즐겁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과정'으로 바라본다. 늙음은 `문제'가 아닌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교육철학자인 브라질의 파울로 프레이리는 “늙고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얼마나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즉 인식론적 호기심으로 구별하여 자신을 `늘 그런 이'로 여기고 늘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늙은이'고, 나와 나를 둘러싼 공동체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저를 묻는 이' 는 젊은이다. 나이가 늙음과 젊음의 구분 척자가 아니다. 프레이리의 분별은 향노화와 일맥상통한다. 

오래 전 KBS에서 방송했던 `청춘의 샘을 찾아서'의 원고를 다듬어 단행본을 펴낸 적이 있다. `노화 방지'라는 용어가 마뜩찮아 순리대로 바로 잡는다는 의미로 `노화수정'을 사용하였다. 당시 머리말의 일부를 따온다.

“노화를 막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노화를 막을 순 없습니다. 단지 그 속도를 덜하게 또는 늦출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다 진지하게 따져 볼 점은 `노화는 무조건 막아야 하는가?'입니다. `모든 인간은 오래 살고 싶어 한다'고 마치 불변의 진리인 양 강조하고 있는 전제에 대한 강한 의문이 늘 작지 않은 크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삶의 길이보다는 도리어 삶의 질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대개 건강한 생각과 생산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일수록 길이보다는 질을 귀하게 여깁니다.”[`노화수정 클리닉', 유형준, 열음사, 199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목소리를 빌린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늙음 속에서 늙음을 새로운 눈으로 열심히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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