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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황혼(The Twilight of Idols)
우상의 황혼(The Twilight of Idols)
  • 의사신문
  • 승인 2018.06.0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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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72〉

박 송 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아침 회진을 하면서 문득 빈자리의 쓸쓸함, 며칠 전에 작고하신 노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부터 5년이나 돌보아 왔으니 병실 환자로서는 나름대로 긴 인연이다. 보행 보조기로 복도를 걸어 다니시던 당신, 회진 때면 유달리 친근하게 맞이하시던 89세 남자 노인의 정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도 이름 자 하나가 머리 속에 맴돌 뿐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벌써 망각의 작업에 들어간 것일까. 한 달에 대 여섯 분이나 돌아가시는 노인병원에서 병실을 떠난 환자에 대한 기억 상실은 그저 당연한 일상일 뿐이다. 또한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는 삼가는 게 예의고, 병실 라운지에서 서로 간의 말 없는 불문율이기도 하다. 빈자리는 곧 이어 새로운 환자로 채워지고 병원의 일상은 늘 그렇게 시작과 망각을 반복한다.

주말이면 찾아오는 중년의 애살 많은 딸이 있었다. 아주 이따금씩 들르는 노년의 동생도 있었지만 처와 아들이 먼저 간 터라 다른 가족은 없고, 간호사의 얘기를 들으면 2∼3년 전부터 손주의 발길도 뜸해 졌다고 했다. 핵가족, 편가족 시대에 아래로 내려갈수록 친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다. 나 역시 조부모나 삼촌에 대한 추억도 단편적이라, 족보나 가첩을 들여다보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억을 회상하지 않으면 그분들의 이름이나 행적을 떠 올릴 수가 없다. 손주는 그저 검은 상복에 2줄의 삼베 완장을 차고 장례식장의 심부름이나 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다. 세대를 건너면 옛사람은 가족에게서도 서서히 멀어져 간다.

환자는 노환이라 수술도 할 수 없는 양성 뇌종양으로 입원했지만 막상 임종 할 때까지 아무런 종양의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가롭게 복도나 창가를 서성이다가 급성 폐렴에 이환된 것은 6개월 전쯤이었다. 내과로 보내 4세대 세파 계열의 항생제까지 사용한 후에 한 달이 넘어서야 겨우 치료되었지만 후유증은 훨씬 심각했다. 면역성이 약했던 고령의 환자가 전신쇠약에 보행이 불가능한 와상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루 종일 멍하니 천정이나 창문을 바라보면서 점점 말이 없어지고, 가시기 두어 달 전부터는 딸자식마저도 그리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죽고 싶다는 말만 되뇌더니,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혼미(stupor) 상태로 접어들면서 식사를 거부하고 수액요법에 의지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수십 명의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정했던 환자 분의 죽음도 요양병원에서 흔하디흔한 자연사(自然死)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최근에 호주의 104세 생태학자(데이비드 구달)가 고령으로 삶의 질이 악화 된다는 이유로 안락사(安樂死)를 택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당사자의 의지라면 불치병이 아니어도 의사의 도움을 받아 조력(助力) 자살을 허용하는 스위스의 병원으로 옮겨 가서,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미디어의 보도에 의하면 본인의 체력과 건강 상태가 나빠져 더 이상 자립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기 싫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안락사 단체에 20년간 몸을 담았던 구달 박사는 모금 활동을 통해 스위스로의 여행과 병원비를 충당했는데, 그는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게 정말 슬픈 일”이라며 “노인이 삶을 억지로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안락사(존엄사)는 회복 불가능한 질병 상태에 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하는 일 없이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많은 노인들에게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일 수도 있다. 고령의 노인들에게 자의적인 안락사는 삶의 부담을 줄여주고 행복한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이성적 자살은 생명의료윤리 쟁점의 하나인 의사의 조력자살이나 안락사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성적 죽음으로서의 안락사에 대한 옹호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심할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한 동의다. 죽음은 전적으로 삶을 영위했던 자신의 판단이고 스스로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니체(F. W. Nietzsche)는 저서 〈우상의 황혼〉에서, 이성적 죽음으로서의 안락사론을 토대로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의 수행을 의사의 도덕적 의무로 제시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무와는 상반되지만,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전체와 화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 대해서 의사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비판의 여지는 남는다. 구달 박사는 104세이지만 불과 4년 전에도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노쇠와 만성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상태로 보였다. 인터넷으로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고, 어렵지만 가벼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길을 선택해야만 했는가? 또한 의사도 죽음을 방조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조력한 사실이 니체의 말처럼 과연 의사의 도덕적 의무인가?

구달의 선택은 어쩌면 신체적인 노쇠와 만성 질환, 은퇴 생활에서 비롯되는 노인 우울증(geriatric depression)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폐렴을 앓고 난 노인 환자가 가족조차도 관심이 없고 식사를 거부하며 평온히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 구달 박사 역시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와는 다른 적극적인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현직에 머물러 있었기에 대학으로부터 사실상의 은퇴 요구를 받고난 후 또 다른 생활에 적응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인생에 대한 새로운 도전, 반전의 선택이 그가 예전부터 주장해 왔던 안락사라는 조력자살의 죽음이었을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간혹은 삶에 대한 철학적 힐링(healing)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생명은 자신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것만도 아닌 사회적 인간의 한정된 삶에 주어지는 숙명적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과 인과 관계의 풀기 힘든 복잡한 매듭을 묶어 왔고, 지금도 그런 실타래를 엮어 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의 우리 자신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끊듯이 자신이 스스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아마도 그건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치유될 수 없는 상처에 연연하여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 치유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상처를 직시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삶의 철학적 방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는 고통은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철학적 고찰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이고 그녀의 상징은 부엉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녘에야 날아오르는 것처럼, 하루가 저무는 저녁이 되어서야 하루를 알 수 있다는 시간과 경험의 담론, 인생의 통찰론적 사유 방식이다.

반면에 니체는 시간의 상징은 오후의 그림자라고 했다. 오후가 되면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 어른들은 늘어난 그림자의 길이를 자신의 연륜의 크기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사실로 경험하지 못한 것들까지 예단하려 한다. 인생의 저녁과 함께 다가오는 정신적 피로, 황혼의 노인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겪은 삶과 경험의 관성만이 있을 뿐이다.

헤겔과 니체의 서로 다른 철학적 담론이지만 결론은 같다. 숲에 어둠이 내리면 노쇠한 부엉이는 날개를 펼 수가 없고, 연륜의 그림자도 빛과 함께 사라지면서 살아 온 관성마저 무너져 어떠한 길도 찾지 못한다. 미네르바와 우상의 황혼에 노화된 지혜와 연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죽음의 선택조차도 무의미해 질 때, 질문의 끝은 망각이고 죽음이다.

진료실 창문 밖 정원에는 5월의 넝쿨 장미가 만발하고, 붉은 꽃잎에 부서지는 신선한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화려한 생명의 몸짓이 어우러지는 계절에, 어쩌면 노인 환자와 구달 박사의 죽음에 대해 자연사니 안락사니 논쟁을 만드는 것도, 형이상학적인 존재와 철학적 힐링을 생각하는 것 자체도 부질없는 일 같기만 하다.

철학은 살아가는 자, 깨어있는 자들의 몫이다. 노인의 빈자리에 갓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다. 누군가가 생전의 당신을 추모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오늘도 삶의 실타래를 엮어가야만 하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닐까. 죽는 날까지 맑고 깨끗한 감성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삶의 아름다운 힐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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