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의 계절
잉태의 계절
  • 의사신문
  • 승인 2018.05.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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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인 호대한의사협회 고문한국의사수필가협회 회장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 피천득의 〈오월〉 한 구절이다. 지금 도심 속 양재천변 꽃길을 걸으며 오월을 보고 있다. 개나리와 벗꽃이 진 자리에 철쭉이 찬란하다. 봄 햇살에 라일락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콧등을 스치고 저 만치 졸졸거리는 물가 돌다리 사이로 민들레가 꽃대를 세우며 한들거린다.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 하며 그 주의를 맴돈다. 그 순간 나는 삶과 생명의 아름다움 속에 취해 버렸다. 이런 자연의 아다지오 속에 느릿한 산보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때가 언제였던가.

그 해 오월은 지옥이었다. 이틀을 병원에서 자고 사흘째 밤 버스에 오르면 한 시간여 졸면서 귀가했다. 내릴 정류장을 놓치고 길 건너가 다시 탄 버스 길은 젊음이 파김치처럼 허우적댔다. 몸과 마음이 피로에 절어 있었다. 어쩌다 그 해 오월부터 신생아실 담당이 된 나의 전공의 시절은 태양 빛을 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분만 되자 마자 새 생명은 마치 자동화 벨트를 타듯 일정하게 신생아실로 전달되어 온다. 아마 여름의 끝 무렵이나 초가을에 잉태된 아기들 일 것이다. 익숙한 처치 후 대부분의 신생아들은 하루 이틀 만에 엄마 품으로 돌아간다. 나의 역할은 선천성 질병 유무, 퇴원 전 점검과 미숙아 관리였다. 한국은 그 해(1976년) 연간 87만명이 태어났다. 지난 해(2017년)에 35만 7천7백명으로 역대 최저라고 하니 당시 분만실이나 신생아실이 어떠 했으랴.

“이번은 1.025킬로그램 남자 26주 미숙아예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제왕수술 한 산과의의 부탁과 함께 대기했던 인큐베이터로 넘겨 받은 `김00 산모 아기'는 그 순간부터 생사의 고비(그 당시 생존율 52.5%)에 빠진 채 태어난 셈이다.(0.8% 빈도) 그의 아프가 스코어(APGAR score)가 4점 전후이었다. 10점이 정상 신생아, 0점은 사산 혹은 사망 상태이다. 그의 생사 여탈권은 주치의인 나의 정성과 미션 능력에 달렸다. NICU(신생아집중처치실)에 도착하자 나는 외쳤다. “심장 모니터와 산소 카테터 달고, 정맥 영양주사 혈관 확보…배꼽 제대혈로 산혈증(酸血症) 체크합시다.”

간호사와 나는 그의 환경을 산모의 자궁 속 상태로 지켜 주어 그의 생명력 회복에 6내지 8점 정도 유지하도록 빈틈없이 처치했다. 그러나 의학적 나의 처치가 자연의 순리에 비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잉태의 순간부터 그들 나름 운명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잠 못 자고 처치하며 지켜 본 미숙아가 허망하게 저 세상으로 갈 때 알게 되었고 그 과정은 잉태 순간부터 다양했다. 6개월 이상 엄마의 심박(心搏) 소리와 태동하며 탯줄로 자양 받던 무균의 자궁에서 쫓겨나듯 출산된 그의 태생적 운명에서 스스로 생존할 힘은 제로에 가깝다. 로마시대는 살아 난 새끼만 도와 주라며 자생력을 키웠다고 하나 시대는 태생 6개월(501∼750그램 체중) 출생아까지 살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는 초반 호흡부전증으로 생사 고비를 넘겼고 폐렴과 장염으로 나의 애간장을 태웠다. “꼭 살려 주세요. 선생님. 우리 가계 유일한 핏줄이고 후계자 입니다.” `강현우' 라는 이름을 지어 팔찌 채우든 날, 현우의 가족 모두가 지켜보며 나에게 매달렸다. 그는 어설프고 거친 인공 자궁 인큐베이터 속에서 지방질 수액으로 연명하던 어느 날, “현우가 10밀리를 빨았답니다.” 간호사들의 환호 속에 그의 체중이 30그램씩 늘어 나고 있었다. 조만간 출생 백일이 되겠구나 할 때 부모의 표정은 태양을 떠 안은 것 같았다. 그 스스로 숨을 쉬도록 폐를 키워내는 것부터 뇌와 평생 뛸 심장을 무사히 살려낸 것이다. 그 와중에 공급한 산소의 양 때문에 예민하고 취약한 망막 손상의 심각한 후유증을 일으켜 시력을 상실하는 순간도 피해 갔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견디며 살아야 할 한 힘의 무게에 비례한다.

그 힘과 의사와 신생아실(nursery) 팀의 조화로운 케어가 한 생명의 남겨진 삶의 조건을 만든다. 1kg 이하의 극미숙아 일수록 나는 서투른 조력자일 뿐이었는데, 최근의 현대의학은 550gm도 살려낸다. 미 아이오와주 디모인의 주 하원은 태아의 심장이 박동되면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이 채택(2018.5.1)되었다고 하니 신생아 담당 의사의 꿈의 영역은 어디까지 인가. 그 당시쯤 이었다. 현우의 집중 치료 중, 샛노란 황달로 지켜보던 신생아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ABO혈액형불일치 용혈 핵 황달 증세로 자칫 평생을 지체부자유로 지날 수 있는 환아로 뇌 손상 순간의 임계 점에서 모든 피를 응급 교환해야 했던 그 날 그 운명의 시간도 오월이었다.

신생아실 팀은 아기들의 표정과 숨소리 피부색깔 울음소리로 대화를 한다. 가끔 이들 중에 열, 구토나 설사 증세를 보이면 감염병으로 바로 탈수증이 생겨 위험하다. 긴장은 일상이고 외부와 단절된 폐쇄 공간이므로 전공의는 인내심을 시험 당 할 때가 많다. 또 미숙아의 가녀린 혈관 주사루트 확보와 후두부 삽관(揷管) 은 힘들고 어렵다. 세심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정맥주사 처치 중 몇 차례 실패 했을 때의 난감함은 큰 자조(自嘲) 스트레스이다. 점적량(點滴量) 체크도 신중하지 않으면 순환 과부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신생아실에 가장 큰 위험 요소는 감염이다. 면역체계가 미성숙하므로 쉽게 패혈증에 빠지고, 손길이 닿는 다른 아기들에게 집단 전염된다. 그래서 근무자 개인 위생은 기본이고 처치실 주위 환경은 오염되지 않도록 무균 관리해야 하므로 전공의는 외부 공기와 햇빛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최근 이화의대 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미숙아 4명이 연쇄 사망하는 사건으로 연관된 의료인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생겼다. 지질 영양주사의 분주 행위 과정에서 특별 균이 오염된 것으로 역학 조사 팀이 발표하여 의료인의 과실인 것처럼 보도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10여명의 수사경찰관들이 무균 미숙아실에 군화발로 들어 닥쳐 비닐을 깔고 의료폐기물을 쏟아 부었다는 믿지 못할 야만적 행태이다. 의료를 모르는 그들의 무지에 소아과 의사들은 가슴 아파 분노하고 있다. 신의 작업에 근접한 극미숙아 생존을 위해 자기가 보유한 모든 지식과 기술로 밤을 지새웠던 의사,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그 젊은 여전공의는 어떤 마음일까.

오월 어느 날,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카네이션 꽃 다발을 든 예쁜 처녀와 진료실에 들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 저 강현우, 이번 주말 결혼합니다.”

죽었거나, 뇌성마비. 실명이 올 수도 있었던 극(極)미숙아 현우였다. 33년 전 신생아실이 낡은 필름처럼 내 기억을 더듬는다. 돌이켜보면 그 해 오월의 폐쇄 공간 속 하루 하루를 마치고 별 빛 퇴근하던 내 신생아실 전공의 시절, 영육이 고달프고 생활이 슬펐었지만 그 때가 의사로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신록의 오월은 또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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