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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핀 코로리
핀핀 코로리
  • 의사신문
  • 승인 2018.05.21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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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30〉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핀핀 코로리. `죽기 직전까지 건강하게[핀핀] 자신의 일을 하며 살다가 한 순간에[코로리] 죽음을 맞자'는 의미의 일본말로 줄여서 `핀코로'라 한다. 발음 그대로 영어로 옮겨 `Pin Pin Korori'여서 약자로 `PPK'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표현으로 `99882314(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삼일 앓고 죽는다)', 영어론 공교롭게도 `Live long,  die short!'로 로저 랜드리의 책 제목의 일부와 같다.

일본 나가노현에는 고령의 노부모를 내다 버리는 산이라는 뜻을 지닌 `오바스테야마(쭣捨て山)'가 있다. 비록 설화이긴 하지만 고려장 풍습이 전해져 오는 나가노현이 늙음의 긍정적 연관 검색어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니 극적 느낌이 든다. 1960년까지만 해도 나가노현은 염분섭취와 관련한 사망자가 많았다. 이러한 의학적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지방정부가 앞장을 선다. 이른바 `핀핀 코로리 프로젝트.' 소금 섭취량을 줄이고 채소 섭취량을 높이며, 나가노현 사쿠시(佐久市) 신사에 핀코로 지장보살상을 세웠다. 지장보살은 일본에서 가장 민간 신앙에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의 장승처럼 일본인들과 친밀하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보살이다. 지장(地藏)이란 말 그대로 `마치 대지와 같이 무수한 종자를 품고 있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이승과 육도(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와 지옥 등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 따라서 핀코로를 간구하며 기도하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대상으론 적격이다. 방문객은 즐거운 용모의 보살상을 만나고, 티셔츠에서 비누, 수건, 귀 청소기, 지장 보살의 얼굴이 양각된 과자까지 핀코로의 이름 아래 지장보살과 인연이 엮인 모든 종류의 상품도 구입할 수 있다. 물론 때도 없이 마을 곳곳마다 `핀코로 송'이 울려 퍼진다.

`제 때에 먹고 잘 자고, 짜고 달고 기름진 음식 조절하고, 채소 즐기고 물마시고, 웃고 운동하고, 나날의 일정을 적극적으로, 이따금 잘 차려입고 외출하고, 친구들과 대화하고'

결국 나가노현은 2010년 처음으로 평균 수명이 남녀 모두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원인은 높은 고령자 취업률과 식생활 등으로 알려졌다. 건강수명이 늘어나 일본에서 의료비 지출이 가장 낮은 지방이 되었다. 그래서 현의 이미지가 향상되어 이주자가 늘고 건강을 주제로 한 관광사업도 왕성해졌다. 핀핀코로리 프로젝트 덕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늙음을 감당하는 대표적 방향은 크게 세 가지 정도 있다. 먼저, 만성 질환 관리의 시각으로 늙음에 의한 병적 요소들을 다루어 늙음을 잘 보존하려는 `질병 관리(sick care)' 방향이다. 한편 늙음에 대항하여 맞서는 `노화 방지(anti-aging)'의 개념으로 피부 강화 크림, 모발 회춘 제품, 미용 수술, 호르몬 요법, 재생 의학, 장기 이식, 유전체 요법 등등의 실행도 허다하다. 합법적 의료 인증기관에서 인정하지 않는 분야를 다루는 미국 노화 방지 의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nti-Aging Medicine)에 노인병 의사의 숫자보다도 더 많은 의사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도 현실이다. 세 번째 방향은 평균 수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건강 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이 방향은 생명은 유한하지만 우리의 자연적인 수명의 상당 기간 동안 계속해서 성장하고 기여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최적의 건강 및 기능 상태를 사망 직전까지 연장한 `생존 곡선의 직사각형화'와 생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쇠하고 무력한 상태를 최대한 감소시킨 `이환율의 압축'과 같은 개념으로 추상적 뒷받침은 가능하다. 핀핀코로리는 바로 이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공교롭게도 미국의 로저 랜드리가 쓴 `오래 살고 짧게 죽자: 완전 건강과 성공 노화 가이드(Live Long, Die Short: A Guide to Authentic Health and Successful Aging)'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잠시 `생명정치'를 생각한다. 생명이나 삶을 정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생명정치'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정치적인 것, 곧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라는 미셸 푸코의 의견이 아니더라도 나가노현 사쿠시에서 생명정치는 `핀핀코로리'라는 집단구호로 노인들의 삶에 긍정적 영향과 더불어 부정적 영향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웃을 수 없고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친구들과 뜨악한 노인들에게 핀핀코로리는 일종의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핀핀코로리한 늙음을 위해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마음먹고 사람 만나는 모든 일상과 일정은 철저히 개인 스스로 하기에 달렸다는 압력. 마치 입학과 낙방, 취직과 실직, 성공과 실패, 그리고 건강과 병약이 마치 자기계발 노력의 잘잘못 탓이라는 집단적 기준이 주는 낭패감과 다름없다.

실제로 핀핀코로리하게 겪고 마무리되는 늙음이 몇이나 될까. `핀핀코로리'를 주문처럼 외운다고 핀핀코로리하게 되는 건 아닐 터. 여러 곡절로 인해 긴 세월 몸져누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넨넨코로리' 모습일 확률이 더 높은 게 사실 아닌가.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늙자'는 “핀핀 코로리”란 집단구호가 “로또 맞아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위중한 환청일까. `햇빛과 어울려 지내다 때가 되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화려한 단풍잎'처럼 구호 하나 머릿속을 `휘익'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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