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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Great Ocean Road
호주 Great Ocean Road
  • 의사신문
  • 승인 2018.05.2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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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6〉

2018년 4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현지에서 `일생에 꼭 가보야 하는 명소'라고 선전하는 Great Ocean Road를 관광하였다. 이 지역은 멜버른에서 서쪽으로 400km 떨어져 있는 바닷가이다. 찬란한 남극해가 가파른 절벽의 해안가와 만나면서 장관을 이룬 이 바다를 현지 여행 광고에서는 `dramatic powerful dangerous and majestic'하다고 최대의 찬사를 나열하고 있다.

이 바닷가 도로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귀국한 3000여 명 용사들이 손과 곡괭이로 건설했단다. 바닷가에 줄을 선 기묘한 바위섬을 `예수님의 12사도(使徒)'로 명명하여 꼭 가야 할 관광지로 개척한 것이다. 이름이 어떻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로 여행하면서 느낀 몇 가지 내 생각을 말해 보겠다.

호주 대륙은 큰 산이 거의 없다. 평원으로 연이어지던 자동차 밖 풍경이 바다에 접근하면서 산길로 변했다. 두 시간 반 만에 어촌인 아폴로 만(Apollo Bay)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하였다. 물고기를 사면 그 가게에서 바로 튀겨서 `fish and chips'를 만들어 주는데 기름이 좋아 입이 짧은 나에게도 맛이 있었다. 생선 이름을 물어 보니, 그냥 이름 모르는 오늘 잡은 고기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잡어(雜魚)'인 것이다. 오늘 잡은 물고기가 `잡어(魚)'이니, 그러면 어제 잡아서 냉장고에 있는 생선은 `잡았어(魚)'겠다. 우리는 밀접한 관계나 흥미가 있는 것에만 특정 이름을 붙인다. 물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 서양인에게는 대부분의 생선은 그냥 fish인 것이다. 그러면 일본말에는 생선 이름이 몇 개나 될까? 정답은 모르지만 일본 스시 집에서 90 종류의 물고기 메뉴를 본 적이 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 관심을 언어로 표시하여 인식화하는 과정이다.

가는 도중에 나뭇가지에서 잠자고 있는 코알라를 보았다. 이 동물은 나무 위에 살면서 땅으로 내려오지 않아 물을 먹지 않는다. 대신 나뭇잎에 있는 물기에 의존한다. 촘촘한 털도 수증기로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코알라 이름도 “물을 먹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원주민 언어 굴라(gula)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사물의 이름에서 형태와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아폴로 만에서부터는 바닷가에 가깝게 도로를 만들어 해안 구경을 하면서 갈 수 있었다. 호주 대륙의 땅끝에 170년 전에 만든 하얀 등대가 있었다. 등대는 이곳을 지나는 호주 선박들의 나침반 노릇을 해왔지만 밤이면 불법 이민선들이 의지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험한 절벽과 거친 파도로 난파선이 많이 생겨 이 지역 이름이 난파선 해안(Shipwrecked Coast)이 되었다. 기록에 남겨진 침몰 선박만 해도 80여 척이란다. 이처럼 이름은 어떤 현상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등대에 붙인 현판을 보니 특이하게도 30년 동안 이곳에 근무했던 등대지기를 기리는 이름판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등대 소장의 현판이지 않았을까?

얼마 후 본격적으로 12사도 바위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명의 흔적이 없는 대자연 속에서 끝없이 펼쳐있는 절벽의 바닷가, 바닷물이 연출하는 다양하고 정교한 파란색의 스펙트럼, 으르렁하며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바위와 부딪쳐 수없이 만들어 지는 옥색의 동그라미들, 굴곡진 절벽 위에는 차 밭을 연상하는 우거진 덤불, 절벽 사이사이 보이는 황금빛 모래사장! 과연 경관이 좋았지만 사실 우리 서귀포 해안보다 더 나을 것은 없었다. Great라는 말에 걸맞게 크기는 하지만.

높이가 45m나 되는 이 바위들의 원래 이름은 `엄마돼지와 아기돼지'인데 1920년대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명칭을 바꾼 것이다. 바위섬과 절벽은 석회암 퇴적층이 융기되어 형성되었다. 바람은 이 자연물에 바닷물로 조각을 하고 있다. 돌섬 아래로 매 14초마다 영겁의 시간 동안  파도가 들어 치고, 바닷가 강풍은 바위 꼭대기까지 물보라를 뿌린다. 바람은 물기로 연해진 사암을 깎아내어 꼭대기의 하얀 바위 잔해가 언 듯 백발처럼 보이고, 아래 부위는 파도에 갈라져 마치 두 발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강풍과 파도의 침습으로 해안선과 바위섬은 계속 모습을 바꾸고 있어 지금은 12개 바위섬 중 8개만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석양이 가까워지자 해안의 풍광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태양이 지는 바닷물이 유난히 빨간색이다. 붉은색이 비추자 바위섬은 몸통이 구부정한 사람 모습 같고, 일렬로 바다에 비친 그림자가 더욱 인간의 자세이다. 떨어지는 태양빛 아래 제법 환하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한다. 모든 빛과 영광은 주님의 소관이다!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This is my Father's world).” 영락없는 사도의 행렬이다.

최첨단 기술에 관심이 많은 K 선생이 드론을 가지고 왔다. 원격 조정으로 500m 내외를 비행하면서 명령에 따라 촬영을 한다. 마치 헬리콥터처럼 해안가 절벽과 바위섬 사이를 떠다니면서 실감나게 대자연을 보여준다. 가까운 미래에는 사진기 대신 드론이 널리 이용될 것이 확실하다.

인간은 `유희의 동물(Homo Ludens)' 이라고도 한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에서 정신적 창조 활동을 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보다도 이를 변형시킨 허구가 더 우리의 관심을 끌고 정신세계를 자극한다. 한 예로 영화산업이 초창기 다큐멘터리 기록물 위주에서 존재하지 않는 주인공이 벌리는 가공의 스토리로 형식을 바꾸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번영을 누리고 있다. 상상의 이름과 내용일수록 더 인간본성에 맞고 때로는 그 창조력이 우리 삶을 위대하게 만든다.

Great는 `크다'는 의미도 있지만 `위대하다'는 뜻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12사도라는 상상의 창조물이 바닷가를 따라 서 있는 Great Ocean Road는, 그 최상의 허구(虛構) 만큼 이나 위대한 인간의 해변 길이자 필생의 명승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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