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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화 선생님을 추억함<8>
김평화 선생님을 추억함<8>
  • 의사신문
  • 승인 2010.06.0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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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화 선생님이 우리과 전공의 1년차로 의국생활을 시작한 나이는 마흔이 훨씬 지난 후였다. 이미 오래 전에 평양의대를 졸업한 후 평양의대와 체코의대에서 신경과 교수 생활도 하셨지만 탈북한 후에는 연세의대의 도움을 받아 의사 국가고시 준비를 하였고, 합격하여 의사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평양의대 선배이신 성애병원 이사장님의 도움으로 광명성애병원에서 인턴생활을 마쳤고 우리과 전공의 생활을 시작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젊은이들과 같이 의국 생활을 하는 것이 많이 힘들어 보였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였고, 나도 선생님이 좀 더 편하게 전공의 생활을 마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였다. 선생님도 나를 편하게 생각했는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의견을 물으며 상담하였다. 그렇게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통해 힘든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북한과의 차이점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와 같이 남한 생활도 적응하지 못하였다. 카메라를 좋아하던 선생님은 카메라를 구입한 후 인터넷쇼핑몰에서 자신이 구입한 카메라가 10만원이나 더 싼 가격에 판매되는 것을 보고 매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마치 사기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는 선생님을 같이 있던 전공의가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공산주의 사회에 익숙한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날인가 방송국에서 사람이 찾아왔고 선생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동안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는데 그때는 방송국의 강력한 요청에 고민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에 거절하였고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북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이라고 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홀로 탈북하여 정착하였던 것이었다. 만약 한국TV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북한 사람들이 보게 되면 가족들이 더욱 힘들어진다고 하였다. 가족들을 만나 보려 노력하였지만 쉽지 않은것 같았다. 가족들을 만날 방법은 통일뿐이라고 했다.

하루 빨리 남북한을 자유롭게 오가길 바라며 이름도 평화로 바꿨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들 날을 보내던 선생님은 술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원래 간질환이 있던 선생님은 전문의 시험을 앞둔 어느날 집에서 홀로 술을 드시다 광명성애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고, 응급실에 도착한 때에는 이미 DOA 상태였다.

친구와 가족도 없던 선생님의 영안실은 같이 일하던 전공의들이 지켰고, 한국 최초 아니 세계 최초의 남북한 의사면허를 동시에 취득한 한 의사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나라 의료계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한 사람이 그렇게 사라졌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최근 천안함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한국에서도 서로의 입장차이로 모든 국민이 무기전문가가 되어 싸우고 있고 북한과도 첨예하게 대립하며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불안한 상황을 지속하고 있다. 뉴스를 보다 문득 돌아가신지 5년이 넘은 김평화 선생님이 떠올랐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아직도 여전하지만 다시 태어나시면 갈등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사시길 기원해본다.

조재범<성애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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