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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돈내코 길의 5월<26>
한라산 돈내코 길의 5월<26>
  • 의사신문
  • 승인 2010.06.0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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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내코 입구에서 본 서귀포<사진 위>와 석축서 인동초<사진 아래>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네번째입니다. 처음 한라산을 간 것은 1999년이었습니다. 어리목에서 올라가 영실로 내려왔는데 오르는 동안 내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에 길이 나고 그 길이 빗물에 쓸려 패이고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한라산을 보았습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한라산 복원 캠페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등산객들에게 능력껏 흙을 한 자루씩 가지고 올라가 패인 곳에 놓아 달라는. 내 발로 허물어낸 만큼 메우겠다는 생각에 한 자루 담아 윗세오름 근처 어딘가에 내려놓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성판악 코스로 해서 백록담을 보았습니다. 비에 흠뻑 젖어 그냥 걸었을 뿐 한라산을 보지는 못했다는 느낌의 산행이었습니다. 관음사코스로 내려오던 기억은 그래도 신선했습니다.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고 빼어난 적송 숲을 지나고.

이번에 다녀온 돈내코길은 지난 15년 동안 막혀 있다가 지난겨울 긴 휴식을 끝내고 다시 사람들에게 출입이 허용된 곳입니다. 백록담까지는 연결되지 않는 길이지만 아직은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라 호젓하고 즐거운 산길입니다.

제주시내에서 돈내코 등산로 입구까지는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5.16 도로를 이용해 한라산 반대편에 있는 서귀포 쪽으로 넘어가는데 양쪽의 숲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60년 대 초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고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며 죄지었던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국토재건’의 구호와 함께 낸 길입니다. 그리고 20년 후엔 또 다른 권력자가 이를 흉내 내어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오로지 삽과 곡괭이만을 들고 피와 땀으로 닦은 이 길을 나는 편안히 달리고 있습니다. 길옆의 풀과 나무는 아마도 그 피와 땀을 거름 삼아 자라나 저렇게 푸른가봅니다.

제주시내에서 돈내코 탐방로까지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러나 서귀포에서 가깝습니다. 돈내코 코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마 서귀포 시내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다는 것일 듯합니다. 탐방로 입구에 내려 뒤를 돌아보니 서귀포 시내와 그 앞의 남쪽 바다가 한 눈에 시원하게 보입니다. 돈내코 탐방로 부근은 다른 곳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햇빛이 잘 드는 경사지에 앞이 탁 트여 있어 남쪽의 평화로운 조망이 일품입니다.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 길 양 옆은 전부 묘역입니다. 문중 묘지도 있고 종교 단체에서 조성한 묘역도 있습니다. 때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이 찾아와 조상 앞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저 아래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 때를 보내겠지요.

돈내코 탐방로 입구는 한가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보통 관리사무실과 주변으로 상점이 몇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그냥 휑합니다. 입구에서 김밥과 간식거리를 좀 살 생각이었는데 상점은커녕 사람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 할인매장에 들러 일행 다섯이 산에서 먹을 것을 사지 않았다면 낭패를 당할 뻔 했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지금은 그냥 지난 15년 동안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나무와 풀과 꽃과 새와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키워낸 저 안이 궁금해 한 달음에 뛰어들고 싶을 뿐입니다. 거기 어딘가 한란도 있을까요?

〈건국대병원 홍보팀 오근식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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