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2:01 (금)
낡은 청진기를 꺼내며
낡은 청진기를 꺼내며
  • 의사신문
  • 승인 2018.05.08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5〉

의사를 육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의과대학 6년을 졸업한 후에 인턴 1년과 레지던트 4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친 후, 보통 2년인 전임의(fellow)까지 마쳐야 명실공히 전문의가 된다. 의대생과 인턴 때는 기본적인 의학 지식을 공부하지만, 레지던트부터는 전문과목만 교육받는다. 전임의는 더욱 세부 전공(예를 들어, 내과 중 심장내과)을 수련받는다. 공부 강도도 대단하다. 필자의 경험으로 의학을 배운 13년간의 공부 과정은 한 해 한 해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못지 않았다. 남자라면 여기에 3년의 군복무 기간이 더해진다.

당연히 의학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세부전공 지식은 깊어진다. 문제는 일반적 의학 지식이나 테크닉과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어버리는 한편 지식, 검사, 치료법이 나날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내 사위는 요즘 인기 있는 영상의학을 전공하고 심장 영상이 세부전공인 의사로 좋은 논문도 제법 발표한다. 객관적으로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교수다. 그러나 집에서는 감기 치료도 못하고 정맥주사도 제대로 못 놓는 돌팔이 의사로 여겨진다. 나만은 그를 이해하고 옹호하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나 자신도 비슷한 처지이니 사위를 감싸줄 입장이 아니다.

비행기 여행 도중 환자가 생겨 승객 중에 의사를 찾는 때가 있다. 수십 년간 핵의학만 해온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이다. 명색이 의과대학 교수님인데 적절한 치료를 할 자신이 없고, 비행기에 구비된 비상 상비약조차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시치미를 뚝 떼고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좌석에 앉아 다른 의사가 나서기를 기다린다. 한번은 아무도 앞장서지 않아 부득이 어떤 간호사와 함께 괴로워하는 승객을 진료했는데, 응급실에서 근무하는지(?) 간호사가 더 능숙하게 환자를 보는 바람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오랜 대학생활을 정리하면서 옛날 학창시절을 되돌아 볼 여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세부전공 같은 개념조차 없었고 일선에서 환자를 치료하며 봉사하겠다는 순수한 마음만 다졌다. 그러나 교수가 되면서 진료보다 교육, 연구에 더 마음을 쏟으며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라도 직접 환자 옆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

물론 작금의 의료환경이 의사에게 매우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저가의 보험 수가, 의과대학과 의사 수의 급증에 따른 경쟁의 심화와 경영난이 주 문제점이다. 의료인의 신분이 저평가 되는 것도 젊은 의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 근본적인 오류는 그동안 의료계의 의견이 무시된 채 결정해온 정부의 보건 정책이다. 여러 해결 방안이 있겠지만 이 자리에서 논의할 사안은 아니고, 내가 강조하는 것은 국민이 의사를 이해하고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성심껏 환자를 진료해 주는 것이 기본 바탕이 된다.

최근 어머니가 악성 인플루엔자에 걸린 후 합병증으로 폐렴이 생겼다. 노인은 폐렴으로 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 인근 종합병원을 가시게 했다. 아들이 내과 의사지만 직접 치료할 자신이 없으니 보호자 노릇만 한 것이다. 항생제를 며칠 투약했으나 기침과 가슴 사진이 별로 호전되지 않아 근심하다 문득 집에 있는 청진기가 생각났다. 다락 위를 뒤져 찾아낸 낡은 청진기로 어머니의 숨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보았다. 40년이 넘은 고색창연한 청진기지만 생각보다 소리가 잘 들렸다. 다행히 폐렴의 특징적인 잡음은 들리지 않았다. 방사선 영상에 나타난 허연 그림자는 사라진 염증의 흔적인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생각해보았다. “청진기로 환자를 진찰해본 지가 얼마나 되었나?” 내가 진료하는 환자가 폐 질환이 있을 때도 가슴 엑스레이 사진과 CT에만 의존했다. 물론 첨단 단층 영상은 선명하고 자세하다. 그러나 의학 영상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병자의 현재 상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일로 퇴직 후 청진기를 들고 환자와 가까이 하는 제2의 의사생활을 다짐하게 되었다. 사위에게도 알려줄 생각이다.

현명한 우리 어머니는 항상 일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초등학교 1학년 받아쓰기 숙제에서 마지막 쪽을 잘 써야 `참 잘했어요' 도장을 그 페이지 위에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의사생활인들 다르랴. 마지막 쪽을 의미 있게 보내야 의사로서의 일생 전체에 `참 잘했어요'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