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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다'와 `잊혀지지 않는다'
`유명하다'와 `잊혀지지 않는다'
  • 의사신문
  • 승인 2018.04.2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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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4〉 

*지난 4월 20일은 저의 은사인 고창순 교수님의 86번째 생신인 날입니다. 고인이 되신 선생님을 기리며 이 글을 바칩니다.

“You don't need to be famous to be unforgettable.”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학회에 참가하던 중 시내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서 본 글이다〈사진〉.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유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고 직역되는 이 글은 독자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유명하다'와 `잊혀지지 않는다'를 비교하여 잊혀지지 않는 사람, 그립고 잊지 못할 사람이 되기를 권하는 글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 한다. 생각해 보니 이 글과 같이 유명해지는 것과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이 두 가지는 비슷한 듯 하나 분명히 다르다. `유명(有名)한 사람'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뜻하고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기억과 생각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니 다른 한자인 유명(遺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명(有名)하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는 수동적인 작용이다.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타인이나 사회에서 내린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적어지고 나에게서도 같이 없어진다. 관심이나 기억은 속성 상 점점 무뎌지고 적어지기 때문에 더 큰 새로운 자극이 와야 지속된다. 또 많은 경우 처음에는 대중의 기대와 흥분으로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게 나타나 더욱 빨리 사라지기도 한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생기는 능동적인 반응이다.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여 기억에 저장한 현상이다. 따라서 틈틈이 외부에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내가 관심을 가진 상태이므로, 적당한 자극에 대하여 또는 스스로 마음 속에서 확대 재생산 되기도 한다. 따라서 `유명'의 경우보다 더 오래 머리 속에 남아 글자 그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 주위 유명한 사람으로 정치가, 경제인, 연예인, 운동선수를 쉽게 꼽을 수 있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어떤 성취를 얻는 순간에는 큰 관심이 쏠리지만 세월이 지나면 작은 추억의 파편으로만 남는다. 유행가에서 쉽게 보는 현상이다. 한창일 때는 모든 라디오와 TV에서 방송하여 항상 들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다. 잊지 못하는 사람은 돌아가신 부모님, 스승님, 친구, 짝사랑 같이 개인마다 다르다. 인생 여정에서 나와 쌓은 인연이 대단하므로 못 잊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 예를 들어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같은 분은 개인적인 연관이 없어도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행적에 감화되어 잊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특성 때문에 우리는 잊지 못하게 되나? 원래 사람은 이기적 동물이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을 때 나를 위해 도와주고 손해를 보며 희생한 사람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4년 전에 이런 내용을 다룬 TV 드라마 〈미생〉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고졸 인턴사원을 회사에 취업 시키고자 그가 제안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실패하자, 책임지고 퇴사하는 상사가 좋은 예이다. 〈미생〉은 이런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 행동을 다룬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뛰어난 연기력이 상승 작용해 초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잊지 못할 드라마'가 되었다.

학교 선생님이 잊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삶의 가르침을 받고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의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주인공 교사는 평생을 한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을 자식 삼아 애정으로 가르치고, 나중에 제자들 이름을 암송하면서 숨을 거둔다. 수 천명 졸업생 마음에 칩스 선생의 유머와 미소가 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고전이 된 이 소설은 학교 선생님이었던 작가의 아버지를 모델로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잊지 못하는 그리운 스승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 일생의 은사인 고창순 교수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선생님 80년 평생의 반을 옆에서 같이 보낸 나는 행운아였다. 교수와 병원 행정가로 눈코 뜰새 없는 바쁜 일상에서도 일개 제자인 나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려 지금의 나를 만드셨다. 또한, 내가 의학을 공부하고 투병을 하는 힘든 시기에 훌륭한 롤모델이 되어 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애정 어린 희생과 본보기로 학문의 길로 들어오고, 업적을 쌓았으며, 학교 선생이 되었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스승님이 떠난 지금도 나는 선생님의 평생 지기인 최영철 회장님과 가끔 만나고 있다. 아마추어 성악가인 회장님이 은사님과 회식 자리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가곡 〈그리움〉이었다. 요즈음 나도 이 노래를 회장님과 같이 부르며, 우리 선생님처럼 누군가에 잊지 못할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다짐한다.

〈그리움〉
- 고진숙 시, 조두남 곡

기약 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 산 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초생 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이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 길 달려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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