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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책갈피가 되고 싶다의사신문 창간 58주년 기념수필 - 은종이
의사신문 | 승인 2018.04.16 13:29
박송훈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독자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책갈피가 되고 싶다 춘분날에 눈 예보가 있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에 하루 종일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탑산 언덕에 갓 피어난 매화꽃이 전부 스러졌다. 겨울눈조차 구경하기 힘든 동쪽의 바닷가 도시에서 감히 춘설(春雪)을 바라다니, 스스로 어이없고 황망한 심정이지만 그래도 기다릴 때가 좋았다. 매화나무 가지에 눈이 쌓이고 그 속에 돋아난 아기 얼굴 같은 하얀 꽃잎과 은은한 향기를 느껴 볼 수 있다는 것, 상상만 해도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꽃샘추위가 매화꽃을 쓸고 갔다한들 발밑까지 다가 선 봄이 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탑산 공원의 나들목 계단에는 검붉은 동백꽃이 피어있고, 한껏 부푼 목련 꽃망울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직 탑산의 숲은 황량하고 삭막한 풍경이지만, 아르누보 난간의 울타리를 장식하는 샛노란 개나리꽃 수풀을 따라 걸으면 매서운 한파의 기억은 벌써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차디 찬 겨울의 말미에서 봄은 항상 기다림으로 시작한다. 동풍 부는 날, 매화와 개나리에서 시작하는 계절은 목련과 라일락, 붉은 영산홍을 거쳐 눈처럼 흩날리는 아카시아 숲에서 절정을 이룬다. 문턱까지 다가온 봄, 대구 본가의 아파트 공원 입구에 늘어선 화사한 벚꽃 길을 그려보면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날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마음이 설렌다.

휴일의 창밖에 어른거리는 봄 햇살을 보며 우연히 서재에서 집어든 빛바랜 얇은 책 한 권, 오래 전에 작고하신 김춘수 선생의 시집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은종이가 한 장 꽂혀져 있다. 낡은 책장에 끼워진 은종이는 세월을 말하듯 뒤는 누렇고 앞은 퇴색한 은회색이다. 아마도 30년은 지난 듯, 당시 발간된 선생의 육필 시집을 구입하여 감명 깊게 읽었던 〈은종이〉 시 한 편을 기념하여 꽂아둔 것이리라.

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 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銀灰色)이다.
- 김춘수(金春洙)의 시(詩) 〈은종이〉 전문 -

집안에 아이들의 마땅한 놀이감이 없었던 궁핍한 시절, 껌이나 담배 갑에서 솎아 낸 은종이로 접기 놀이가 유행처럼 번졌던 시기가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또래의 아이들은 은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새와 사슴, 코끼리 같은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서로 보여주며 자랑하곤 했었다. 좀 더 나이 든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읽고 있던 책의 책갈피로 은종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책갈피 은종이는 아스라한 기억의 코끼리가 되고, 새하얀 앵두꽃이 만발하는 4월의 들판을 걸어간다. 활자보다 작은 코끼리, 추억의 그림자는 보일 듯 말 듯 멀고도 아득하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느릿느릿 앵두 밭을 걸어가는 코끼리의 발자국도, 들판 언덕에 파릇파릇한 풀빛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시인(詩人)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봄볕은 반짝이는 은종이 은회색의 애틋한 그리움이다.

70년대 경북대 학보사 학생기자로 있을 무렵, 취재차 선생의 교수연구실을 찾은 적이 있다. 연구실은 동향의 본관 1층 계단 옆이라 한낮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방이었고, 책상과 서재 모두가 짙은 갈색으로 지적인 감성이 배어있는 선생의 시 분위기와도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해박한 모더니즘 인식론을 들으며 녹차 한 잔을 마시고 시집 한 권을 선물로 받아 나왔다.

작은 얼굴에 왜소한 체구였지만 소년처럼 초롱초롱한 눈빛, 차와 과자를 권하시던 선생의 50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꽃을 좋아했던 당신, 5공 시대의 지우고 싶은 정치 이력도 있지만 〈접시꽃 당신〉의 배신과는 비교가 안 된다. 진취적인 선생의 모더니즘 실험정신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선비 같은 선생의 지적인 감성은 시구(詩句) 한 줄마다 춘설의 매화꽃 향기가 서려 있다.

벚나무의 버찌 열매보다 크고 빨간 앵두, 꽃은 벚꽃과 비슷하지만 요즈음은 근교의 들판에서조차 거의 자취를 감췄다. 집 안뜰이나 우물가에 몇 그루씩 심었던 키 작은 앵두나무가 관상용 도시화에 밀려 이제는 외딴 시골에서나 볼 수 있다. 앵두꽃의 추억만큼이나 멀어진 〈은종이〉 시에 대한 기억, 시집에 책갈피가 없었다면 이 한가로운 봄날에 선생의 감성적인 정서와 다정다감했던 옛 모습을 회상이나 해 볼 수 있었을까.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다. 글을 쓰는 사람 누구나 독자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책갈피 은종이가 되고 싶다. 봄날의 탄생과 피어나는 꽃잎들, 의사신문 58주년 창간 기념일을 맞아 6년 전 처음 썼던 졸작 `봄볕, 한 장의 사진'과 `장미공원 가는 길'을 다시금 읽어 본다. 과거를 돌아보고 오늘의 나를 성찰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의사신문의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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