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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샹즈(駱駝祥子)
낙타샹즈(駱駝祥子)
  • 의사신문
  • 승인 2018.03.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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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71〉

박 송 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그러나 비가 공평하게 내리는 것은 아니다. 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에….
해는 짧고 날씨 또한 추우니 길가에 사람이 많을 리 없다. 이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도 한 끼 밥벌이를 하기 힘든 게 인력거꾼의 삶이다. 늙은이들은 집에 마누라며 새끼들이 있고, 젊은이들은 부모와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겨울이면 인력거꾼의 가족 모두가 지옥 같은 생활을 하는 셈이다. 귀신보다 각박한 삶이다. 개들처럼 길거리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것이 그들에겐 최대의 안식일지도 모른다. 얼어 죽은 귀신은 얼굴에 웃음을 띤다고 했던가.
- 라오서 (老舍, 1899년 ∼ 1966년), 〈낙타샹즈〉 본문 중에서 -

유머 작가로 알려진 라오서는 그의 소설과 희곡에서, 실패한 인생이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인물을 창조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낙타샹즈'다. 군인들에게 인력거를 빼앗기고 낙타를 훔쳐 병영에서 탈출했기에 `낙타'라고 불리는 시골 청년 샹즈, 소설은 베이징에 사는 가난한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것이다. 라오서는 하층 서민의 애환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20년대 후반,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구체제의 붕괴와 함께 대륙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점차 기울어 가고 있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었지만 부정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한 가운데, 빈곤한 노동자, 농민 계층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정치적 혼란의 중심에 베이징이 놓여 있었다. 라오서는 베이징의 정치적 내우외환의 상황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인력거꾼 샹즈의 밑바닥 인생의 모습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가 지녔던 비윤리적인 문제점을 파헤치고, 통치 집단에 의해 억압받았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무한한 동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샹즈는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꾸준히 인력거 살 돈을 모아 자립하려고 하지만 온갖 사기꾼과 폭력배들에게 번번이 당한다. 처음에는 근면하고 성실하며 착한 시골 청년이었지만, 참담한 도시 생활의 경험은 동료나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사라지게 하고, 오직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도시인으로 변해간다. 결국 그는 도둑이 되어 동료들을 배신하고, 비참한 현실을 잊기 위해 순간의 작은 쾌락인 마약, 술, 도박에 빠진다.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삶에 행복이라는 보상이 있을까? 샹즈의 운명론적 비관주의는 스스로 자조 섞인 자괴감으로 함몰한다. `인생은 암담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다. 가난에 찌든 수레바퀴 같은 삶의 고통은 독한 술과 매춘부라는 처방으로 잠시 무뎌진다. 독을 죽이기 위한 독, 더 나은 방책이 있는가?'

1958년 6월에 중국 희극(戱劇)출판사에서 출판된 라오서의 또 하나의 대표작, 화극(話劇) 〈찻집, 茶館〉은, 50년에 걸쳐 중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부류의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희곡에 나타나는 숱한 군상(群像)의 갖은 희극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웃을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참담하고 비극적임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청나라 말기와 민국 초기 및 항일 전쟁 승리 이후로, 세 역사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조정의 부패상과 제국주의의 침략, 군벌의 난립(亂立), 국민당의 압제적인 통치와 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그려내고 있다. 문학 비평가들은 라오서를 유머 작가로 평하지만, 그에게 유머란 풍자도 해학도 아닌 헤어날 수 없는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심중에서 우러나는 절박한 외침일 뿐이다.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라오서의 작가적 관점이다.

라오서의 본명은 수칭춘(舒慶春)으로 소설가이자 극작가다. 1946년 미국에 강연 요청을 받고 갔다가 1949년 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에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요청으로 귀국했으며, 1950년부터 1966년에 죽을 때까지 중국 작가협회 부회장, 중국 정치 협상 회의 위원, 베이징 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에는 중국 문단에서 대표적인 화극으로 평가된 〈용수구(龍鬚溝)〉를 발표함으로써 다음 해에 베이징 시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다(정치적 어용성이 강한 작품이라, 라오서는 한 번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낙타샹즈〉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되는 영광을 누렸고, 화극 〈찻집〉 역시 서구에서 처음으로 상연되어 `동양의 기적'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동서 냉전의 죽의 장막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예순아홉 살의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자)', 반동적인 학술 권위자로 몰려 뭇매를 맞고 우스꽝스런 경극(京劇) 복장으로 공개적인 비판대 위에 섰다. 홍위병들에게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원고와 그림들이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음날 라오서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택동시사〉를 들고 나갔지만 종적이 묘연한 채 그의 시체가 타이핑후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라오서의 의문의 죽음과 함께 풍자적 유머의 작가로 불렸던 그의 소중한 작품들이 금서가 되는, 그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 비극적인 모습을 남겼다.

1978년 6월 3일 베이징의 서쪽 교외에 있는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革命公廟)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 문화부, 베이징 시 혁명위원회와 중국문련 및 중국작가협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라오서의 유골 안장식이 거행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골함 속에는 유골은 없고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안경과 붓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사인방(四人幇)은 제거되었지만 아직 마오쩌둥의 망령은 그대로 남아 있는 터라,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작가에 대한 명예 회복의 자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촐한 분위기였다.

젊은 시절, 궁핍한 생활과 홀로 된 노모와의 갈등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 5년 동안 런던에 체류했던 라오서, 중국인을 마약이나 아편쟁이로 취급하는 영국인의 편견과 인종 차별을 직접 겪었던 그였다. `약한 나라의 사람은 개일 뿐', 당시의 소설 〈마씨 부자〉는 그런 라오서의 서양인들에 대한 냉소적인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자국민이 멸시 당하지 않으려면 중국이 강해져야 하며,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세대 간의 갈등을 완화시켜야만 한다는 변혁에 대한 열망, 라오서는 서구의 생활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청년기 시절부터 이미 애국주의 지식인의 소양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애초에 라오서에게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유교적 전통과 계층적 차이로 인해 차별과 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한 정치적 혁명을 달성하자는, 마오쩌둥의 통일 중국에 대한 열정적 관념에 순수한 작가적 감성으로 이끌려갔을 뿐이었다. 신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결국에는 자유를 잃고 독재자의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암담한 현실에 부딪혔다. 북경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라오서는 낙타샹즈의 주인공처럼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중국 최고의 문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념적 독재 권력에 휘말려 이용 당하다가 배척되는, 어쩌면 라오서 스스로 비극적인 말로를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3천만 명의 아사자를 초래한 대약진운동, 명망 있는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한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광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러져 갔던 라오서가 〈찻집〉의 대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하오. 하지만 나는 누가 사랑해 준단 말이오?' 바로 이 말이 아니었을까?

낙타샹즈, 오늘도 베이징의 거리에는 여전히 인력거가 다닌다. 과거와 다른 점은 사람이 직접 끌지 않는 자전거 인력거이고, 주로 관광지 주위에 몰려 있다는 것, 그리고 시당국의 허가를 받아 번호판을 달고 있다는 것 등이다. 사회적 환경은 변했지만 손님을 기다리는 남루한 모습의 인력거꾼들 역시 가난한 도시 빈민들이고, 공산당의 통치 하에서도 정치경제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없기는 90년 전과 다름이 없다. 외국인을 태우고 한가롭게 지나가는 인력거 옆의 텐안먼 높은 성벽에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근엄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에필로그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한동안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폄하하고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적이 있었다. 오히려 부패한 장제스 정권을 옹호하는 서구의 냉전 논리를 따르기도 했다. 1989년 4월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門) 사태로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중국 현대사의 빈 공간, 중국 공산당의 역사와 엘리트주의 권력의 양면이 우리에게 그 모습을 소상하게 드러냈다.

혁명의 역사는 승자의 정치적 선동과 권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시대를 일관하여 시민사회의 저변부에 팽창한 정치적, 경제적 약자의 분노가 혁명의 역사적 실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마오쩌둥의 통일 중국과 신사회주의 건설은 일면 정당성이 부여되지만, 그 후의 권력화된 이념은 반드시 또 다른 혁명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의 개방정책과 더불어 중국의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뤘지만, 정치는 아직도 마오쩌둥의 구태와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정권은 안정과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장기권력체제를 구축하려하고 있지만, 반체제 지식인과 함께 다수의 민중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절대 권력과 공산당 엘리트주의, 부패한 행정관료체제, 극심한 빈부차로 인한 시민 사회의 내부 갈등으로 얼룩진 중국몽(中國夢)과 중화민족주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혼란한 격동기와 혁명의 시대, 중국의 근현대사를 살아간 라오서의 인생 역정과 작품을 통해 다시금 요즈음의 중국 사회를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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