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2:01 (금)
아흔 살의 시계
아흔 살의 시계
  • 의사신문
  • 승인 2018.03.05 0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늙음 오디세이아 〈22〉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1927년 9월25일 생이니 만 구십세다. 90세연에 맞추어 김남조 시인은  열여덟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졸(卒)을 초서로 쓰면 아홉 구(九)와 열 십(十)을 위아래로 이어 쓴 모양이고, 나이 90쯤 되면 얼굴에 반점이나 검버섯이 생겨 마치 언[凍] 배[梨]의 껍질처럼 보여 아흔 살을 졸수(卒壽) 또는 동리(凍梨)라고도 한다. 그러나 즐겨 쓰기엔 글자의 뜻이 민망해서 필자는 90세라고 쓴다.]

“그대의 나이 90이라고/시계가 말한다/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그대는 90살이 되었어/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알고 있다니까,/내가 다시 대답한다//시계가 나에게 묻는다/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내가 대답한다/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그러나 잠시 후/나의 대답을 수정한다/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그럴 테지 그럴 테지/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그쯤이 정답일 테지……/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시계' 전문, 〈충분한 사랑〉, 김남조)

오래 사는 일과 재물과 사랑. 오래 산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둘이 내놓는 대답의 차이를 따질 틈도 없이 시간은 여전히 저만치 가고 있다. 1950년 문단에 데뷔했고,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발간하면서 평생 시 인생을 살아온 노시인은 그 90년을 시로 표현하는 게 가장 수월했을 것이다. 생명과 생명에 기초한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고뇌를.

김남조 시인의 시를 읽으며 미국의 여류 시인 네이딘 스테어(Nadine Stair)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23세에 시인으로 등단한 김남조 시인과 달리 85세가 되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인생을 다시 산다면(If I had my life to live over)'에서 데면데면하게 보낸 세월을 아쉬워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번에는 실수를 더 많이 하리라./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지금보다 더 어리석어지리라./심각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줄이고/대담하게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여행도 더 많이 다니련다./산에도 더 자주 오르고 강에도 더 자주 가련다.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먹고 콩은 줄이리라./현실의 괴로움은 늘어날 터이나 가상의 괴로움은 줄어들리라./보다시피, 나는 시간시간, 하루하루를 분별 있고 건전하게 사는 사람/오, 나는 의미 있는 순간들을 체험해 보았다. 하여 다시 산다면, 그러한 순간을 더 많이 체험하리라. 사실,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느니 그런 순간들이면 족하리라./기나긴 세월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살지 않고, 한 순간 한 순간을 살리라./나는 여태까지 온도계와, 온수병과, 비옷과, 낙하산 없이는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나니/다시 산다면, 이번엔 가벼이 차리고 여행하리라.//내가 다시 산다면 이른 봄에 맨발로 시작하여 늦가을까지 맨발로 다니리라./춤추는 곳에 더 자주 가련다./회전목마를 더 자주 타련다./데이지 꽃을 더 많이 따련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전문, 네이딘 스테어

버킷 리스트 같은 이 시는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직을 박차고 영적 탐구를 떠났던 람 다스(Ram Dass)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그의 대표 저서`성찰'에서 '항상 지니고 다니는 글'로 인용하면서 전 세계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시가 지니는 비유와 절제를 감안하더라도 살아온 궤적이 같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늙음 시계'를 대하며 상통하는 한 가지를 느낀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음은 내가 늙었다고 철저히 인정함과 같다'는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가는 시계의 속도를 나에게만 빠르게 적용하거나 또는 느리다고 여기려는 일은 착각일 뿐이다. 어릴 적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익히듯이 늙음의 시계를 제대로 보는 `철저한 인정에 세워지는 소망'의 역설을 익히고 다져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90세 생일을 맞은 김남조 시인이 시집 봉정식에서 한 말이 가슴 속을 맴돈다.

“십년 전에는 교만하게도 이제는 남의 좋은 시를 읽는 이로 남아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더 솟아나면 쓰겠습니다. 삶의 의미심장함과 응답자의 감개무량, 더디게 익어가는 인생관이 모두 오묘한 축복입니다. 가능하다면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습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십년 전, 시인은 정확히 여든 살이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