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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를 꿈꾸다 의사가 된 친구
성직자를 꿈꾸다 의사가 된 친구
  • 의사신문
  • 승인 2018.02.2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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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1〉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이번 2월 말 의과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는 고영초 동기의 기념행사에 다녀왔다. 항상 긍정적이고 웃음이 가득한 그가 보낸 알찬 교수생활을 축하하고,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기원하며 이 글을 쓴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신부가 되려 다 의사가 된 사람이다. 아들 하나를 사제로 봉헌해 달라는 성당의 기대에 부응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소신학교(신부를 양성하는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그가 웃으면서 두 가지 인연을 들었다. 하나는 두 형이 모두 성직자의 길을 거절하였고, 또 하나는 어렸을 때 겪은 4·19혁명이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으로 학교에서 귀가 길에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를 구경하다가 얼떨결에 그들과 휩쓸렸다. 대학생들과 거리를 행진하면서 길을 잃고 하룻밤을 이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경찰이 총격하는 난리 속에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부모들은 생사를 걱정하는 기도를 하면서 살아오면 신부로 키우겠다고 하느님에게 약속을 했단다.

어려서부터 성당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가톨릭 교단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에서 무난하게 성직자가 되는 교육을 받는다. 그 학교는 일반 고등학교와 전혀 다른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학력이 다른 학생보다 엄청나게 낮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배들이 대학입시 예비고사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한 것이었다. 충격과 함께 회의를 느낀 그는 3학년 초에 일반 고등학교로 편입했다. 1년을 열심히 공부하여 놀랍게도 그는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하게 된다. 본인 말이 수학은 주관식 한 문제 밖에 못 풀었으나 라틴어를 공부한 덕분으로 영어와 독일어는 아주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신부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단단히 기초 인성 교육을 받아 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그는 우리와 무엇인가 달랐다. 또 그 바쁜 의학공부 외에도 신앙생활과 접목한 의료봉사를 열심히 하였다. 짧은 시간 공부하여 의대에 들어 온 지적 능력(지력)에, 건강하게 태어난 신체를 테니스로 단련한 체력이 있고, 신앙으로 굳어진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는 점차 그를 돋보이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우수한 의과대학생 중에서도 그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되었다. 특히 뛰어난 머리에 집중력이 있어 의과대학 성적도 최우등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를 더욱 다지게 한 인생의 전환점은 의과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당한 뺑소니 교통사고였다. 신경외과 병동에서 혼수상태로 9개월을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 가난하지만 효자인 그는 병실에서 아버지를 직접 간호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힘들었던 이 시절, 교대로 병실을 지켜주고 치료비를 모금해 준 친구들을 지금까지 고마워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공과목으로 신경외과를 선택하고 정진하여 마침내 사립 대학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된다.

뇌종양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로 이름을 얻게 되고, 의과대학 학장도 역임하였다. 또 한 가지로 학생시절에 시작하여 45년 간 계속하고 있는 의료봉사이다. 과거에는 도시 빈민층이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가톨릭 성당의 지원 아래 외국 노동자, 사회에서 소외된 노약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변함없는 노력과 희생이 인정을 받아 보령의학 봉사상, 장기려 의도상, 국민추천 대통령 포장을 받았다. 학장이 되어서는 의료봉사를 사회의학 교과목으로 만들어 후속세대의 교육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언제나 행복하여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주고 있어 즐겁단다. 불교 윤회설에 의하면 우리는 여섯 가지 종류의 삶의 세계로 윤회한다. 즉,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계가 있어 업보에 따라 이 중 한 개의 세상에서 일생을 보낸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현재의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 같이 살면서도 마치 `천상계' 같은 주위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지옥계' 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의 참 뜻이다. 그는 아마도 천상계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이에 관계되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그가 존경스러워(?) 가깝게 지냈다. 우리 급우 몇 명은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그를 따라 가톨릭학생회 주관 의료봉사에 참여하곤 하였다. 그는 친구의 어려움도 잘 보살펴 난치성 뇌종양이 생긴 동창생을 본인이 연수 받았던 독일병원에 동행하고 가서 수술로 완치시킨 적도 있다. 내적인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단정하고 온화한 용모는 혼기의 딸을 둔 아주머니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가 인턴으로 시립병원에 파견 나갔을 때 그를 사위로 삼으려는 소아과 여과장님에게 몇 차례 식사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군복무를 시작한 해에 그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서울 근처 군병원에 있는 친구들이 함을 지고 신부 집에 행차를 하였다. 내가 함을 파는 마부가 되어 흥정을 하게 되었다. 함 값으로 대충 원하는 금액을 받아내고 배도 고파, 우리를 끌어 당기면 못 이기는 척 집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있는데도 이 집 식구들은 눈치도 없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답답한 나는 “신랑이 얼마나 똑똑한지 아시느냐?”고 몇 번 소리 질렀다. 집안에서 기다리던 장인 어른이 참다못해 “우리 딸도 똑똑하다”고 응답하셨다.

내 생각에도 부인은 진짜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어려운 전문직업인 영어 동시통역사이기도 하지만 고영초 선생의 참 가치를 알고 평생을 옆에서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과 휴가철이면 의료봉사를 떠나는 남편, 현실적인 경제관념이 없이 하늘에 저축하는 가장을 이해하고 지켜주기 때문이다.

육신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는 의학은, 영혼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종교에 닿아 있다. 아프고 병든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 나를 섬기는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친구는 독실한 신앙과 뛰어난 의술이 시너지를 이루면서 평생 환자를 위해 봉사하였다. 하느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성직자이라면, 고영초 선생이야 말로 의업을 통해 그가 꿈꾸던 신부에 가까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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