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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발랑베르그
닥터 발랑베르그
  • 의사신문
  • 승인 2018.02.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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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20〉 
유 형 준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시인·수필가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발랑베르그라고 합니다. 전직 의사죠.”

한 프랑스 작가의 글을 통해 닥터 발랑베르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은 전직 의사였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일흔을 넘었으며 부인과 노후를 겪고 있다는 정도다. 더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가가 단편적으로 전해준 발랑베르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현재 정세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곳에선 몇 년 전부터 노인들을 배척하는 운동이 점점 노골화 되고 있었다. 대통령은 신년 담화를 통해 “노인들을 불사의 로봇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생명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이어갔다. -- 정치가들은 의사들이 너무 쉽게 약을 처방한다고 비난하였다. 의사들이 공익은 뒷전으로 돌리고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 마구잡이로 노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 먼저 정부는 인공 심장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그 다음에는 피부와 신장과 간의 대용물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동결시켰다. -- 이상한 것은, 그 담화가 75세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고 그의 `뛰어난 임무수행 능력' 자체가 상당부분 첨단 의학의 보살핌 덕분에 발휘되고 있는 것임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뒤이어 한 사회학자는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 나와서 사회보장의 적자는 대부분 70세 이상의 노인들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담화가 있은 후에 70세 이상의 노인들에 대해서 약값과 치료비의 지급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75세부터는 소염제에 대해 환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80세부터는 치과 치료에 대해, 85세 부터는 위장 치료에 대해, 90세부터는 진통제에 대해 환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또 100세 이상의 노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료 의료 서비스를 일절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즈음에 보건복지부에는 이런 포스터가 나붙었다. `65세는 괜찮아요. 70세요? 손해의 시작이죠!'(`황혼의 반란' 베르나르 베르베르)

노인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산속에 모여 지도자를 세우고 점차 세를 불려 전직 장성들이 다량의 무기를 가지고 합류하면서 무장도 갖춘 게릴라 활동을 한다. 스스로 `흰여우들'이라 지칭하고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슬로건도 내건다. 소식을 글로 전해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를 `황혼의 반란'이라 부른다. 발랑베르그는 비교적 초기에 연발식 소총을 가지고 참가한다. 재주가 많은 발랑베르그는 동료들에게 토끼 올가미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병에 맞는 약이 없어서 죽어가는 흰여우들을 위해 전직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황혼의 반란'군은 지속적 게릴라 활동을 펼치면 대통령과 정부가 물러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상황은 판단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반란군은 더 늙고 병들어 하나하나 죽어 갔다. 기력이 쇠하여 죽고, 먹을 것을 구하러 나섰다가 낙상으로 죽기도 하고. 이즈음 이런 소문도 돌았다. “그들은 우리를 없애 버리기 위해 독극물 주사를 놓고 있어요.”--“하지만 노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들에게 주사를 놓는데 그냥 가만히 있겠어요?” “그들이 독감 예방주사를 놓는다며 노인들을 속이는 거죠.” 보건복지부장관은 독감 바이러스를 반란군 위에 살포하여 반란군을 제압할 대책을 세웠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함성은 `살아있는 한 손해'라는 명제에 묻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헬리콥터들이 숲 위로 날아올라 바이러스 샘플들을 다량으로 살포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인구가 7퍼센트에서 14퍼센트 이상이 되는 고령화 속도는 프랑스에 비해 2배보다 빠르고, 14퍼센트 이상에서 20퍼센트 이상이 되는 초고령화 속도는 4배보다 더 빠르다. 팔 년 뒤인 2025년에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 천만 명 시대를 맞게 되고, 205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40퍼센트 이상이 노인이다. 또한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7'에 따르면 우리나라 66세 이상 노인들의 상대적 빈곤율은 2013년 49.6 퍼센트로 OECD 국가의 평균인 12.6 퍼센트보다 현저하게 높다. 가난하고 병든 노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늘고 있다.

`황혼의 반란'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200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닥터 발랑베르그는 소총과 토끼잡이 올가미를 들고 있다. 의료와 관련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반란을 이끌던 지도자가 자신에게 독극물 주사를 놓은 자에게 던진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게다”라는 말이 `황혼의 반란'의 태동과 소멸에 어떠한 구체적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답답함에 공감하는 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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