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다자이후(太宰府)의 매화 〈하〉
다자이후(太宰府)의 매화 〈하〉
  • 의사신문
  • 승인 2018.02.12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世風書風 〈70〉
박 송 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화혼한재(和魂漢才)

 시오지야마(四王寺山)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저녁 바람이 다자이후세이쵸(大宰府政廳)의 옛터를 지난다. 화재로 소실된 관청의 표석과 주춧돌만 남은 평원, 사적(史蹟) 공원의 가장자리에는 아담하게 조성된 산책로가 있고 이를 따라 걷다보면 여기서도 매화나무 숲을 만난다. 정면의 시오지야마 산정(오노죠, 大野城)과 서쪽 자락의 평지(미즈키, 水城)에는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백제 유민들이 쌓은 산성과 토성의 잔해만 남아 있다. 황량한 벌판에 어지럽게 우거진 풀숲에는 다자이후까지 흘러 온 망국의 혼들이 깃들어 있음일까. 폐허의 유적에 서면 역사의 흥망성쇠와 세월의 무상함은 애잔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이메이(齊明) 천황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3만의 군대가 백강 전투에서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하자, 왜군은 남은 배들을 수습하여 백제 유민들을 싣고 큐슈로 돌아왔다. 신라의 보복 공격을 우려한 나카노오에황자(中大兄皇子, 덴지천황))는 하카타(博多)의 관가(官家)를 16km나 남쪽으로 후퇴시키고, 유민들을 직접 지휘하여 방어 산성을 쌓게 하고 다자이후에 행정 공관을 건립하였다 한다. 현재 다자이후정청과 주위의 유적은 일본의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자이후정청이 관할했던 기타큐슈(北九州) 지역은,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견당사가 폐지될 때까지 해외 문물의 교역 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에 한반도로 출병을 하거나, 외부로부터 침입을 받을 시에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백제로 구원병을 보냈고 임진왜란의 출병을 준비했던 근거지였으며, 여몽 연합군이 일본에 처음 상륙한 곳도 다자이후의 북쪽 항만 도시 후쿠오카 부근이었다.
 
 고래로부터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금속기 기술이 전파되었고(彌生, 야요이 문화), 가야와 백제의 문물과 문화가 전해졌던 곳도 기타큐슈의 북쪽 해안 지역이었다. 바닷길은 혼슈(本州)와 큐슈 사이의 간몬해협(關門海峽)을 통과하여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나면 오사카(大阪)에서 육로로 교토와 연결된다. 야마토 시대의 북큐슈 행정청(管家)은 문화적, 군사적 요충지인 하카타 지역에 있었으며, 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오는 사신의 접대와 견수사, 견당사의 출발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일본에 천자문과 불교, 천문, 의학, 음악, 의복 기술 등 선진문물을 전해준 백제와는 단순한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일본의 천황가와 귀족의 지배층에게는 백제가 혈연적, 문화적 고향과도 같은 존재임을 의미한다. 일본은 백제의 문화적 토양 위에 당과 신라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여 나라(奈良) 시대의 불교적 색채가 강한 하쿠호(白鳳) 문화를 일으켰다. 또한 이 시기는 한자를 이용해 일본어(히라가나)로 표기하는 일본 고유의 정형시인 와카(和歌)의 서막을 알린다.
 
 국제문화를 형성하며 번성했던 당 나라가 안사의 난을 거쳐 황소의 난으로 쇠퇴해가면서, 견당 사절단(100∼200명)의 운용에 비용이 많이 들고 동중국해를 가로지르는 위험한 항해로 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교류가 점점 힘들어 졌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조정에 견당사의 파견을 중지를 건의하고, 주류층에 팽배한 당풍 문화 속에서도 서서히 싹터가는 고쿠후(國風) 문화를 가속화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국풍문화란 일본 고유의 사상과 의식을 중시하는 풍조로서 그 근본 바탕에는 가나 문자의 성립이 있었다. 고지키(古事記)나 니혼쇼키(日本書紀), 특히 만요슈(万葉集)를 거치면서 일본어 음을 한자로 나타내는 만요가나가 꾸준히 사용되었고, 점차 가나 문자의 체계가 잡히면서 정착되었다. 히라가나는 와카와 모노가타리(物語, 산문)를 쓰기 위해, 가타가나는 한문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히라가나로 글을 쓰는 창작자는 궁중의 여인들이었고, 가타가나의 동량(棟梁)은 지배층의 귀족과 지식인들이었다. 한 나라가 스스로의 문자 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국가의 주체성과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학문의 신으로 숭상 받는 이유는, 일본 고유의 와카와 중국의 한시문에 능통한 그가 자신이 주장한 화혼한재(和魂漢才)의 정신을 지켰다는 사실에 있다. 중국의 한자 문화권에서 학문을 배우고 익힐지라도 일본 고유의 정신인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국풍문화의 증진은 문학, 미술, 공예, 서도 등 다방면에서 나타났지만 와카나 모노가타리에서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헤이안 시대 후반부를 장식한 일본 고전문학의 백미,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모노가타리〉는 최초의 장편소설의 쟝르에서,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는 일본 수필 문학의 효시로 꼽는다.
 
 대륙과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는, 지정학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정서적으로는 폐쇄적이 아닌 섬나라 열도의 용광로 속에서 일본인들의 방식으로 용해되었다. 화혼한재와 좋은 것은 받아들인다는 `이이토코토리' 정신은, 고대 이후 근세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문화의 일반적인 수용형태이자 일본문화의 형성과정이다. 일본의 예술과 문화는 단순한 모방성을 벗어나 창의적으로 나아갔고, 그들의 신앙인 종교마저도 신불습합(神佛習合)의 형태로 같은 길을 걸었다. 중국과 조선에서 전해진 다도(茶道)와 화도(花道, 꽃꽂이 문화)는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특이한 건축 양식과 화려한 차경정원, 우키요에(浮世?)의 판화 등 문화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이루었다.
 
 화혼한재의 사유양식은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사상가들에 의해 일본을 발전시킬 구체적인 행동양식으로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으며, 일본 근대화의 시대적 정신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에도 막부는 선교사의 포교를 금지했지만 네델란드의 난학(蘭學)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화혼난재(蘭才), 에도 막부의 말기부터는 서구의 근대 문명을 수용하는 화혼양재(洋才)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스가와라가 처음 주장했던 문화 예술적 화혼(和魂)은, 메이지 이후 일본 민족주의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천황 중심의 국체론(國體論)을 가미하여 군부 강경파들에 의해 야마토다마시이는 군국주의 성향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태평양 전쟁의 처참한 패배로 대동아공영권을 추구했던 제국주의는 무너졌지만,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지원으로 경제대국을 이루었다. 오늘날 미국과 독일이 선점하여 전세계로 확산시킨 21세기의 4차 산업혁명에서도, 일본은 서구의 서비스 기반의 인공지능과는 달리 축적된 제조업 기술을 바탕 삼아 인공지능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는 오롯이 일본의 정신과 기술로 일어설 수 있다는 화혼화재(和魂和才)의 주창은 일본의 정치경제적 자부심을 반영한다.
 
 매화는 차갑고 황량한 겨울의 말미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 같은 꽃이다. 헤이안 시대의 뛰어난 문인이고 혜안의 정치가였으며 일본의 국풍문화를 선도했던 스기와라노 미치자네, 그는 텐만구의 `학문의 신'일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야마토다마시의 정신적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다섯 꽃잎 다자이후 시의 상징인 매화는 텐만구의 천신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로부터 비롯한다. 토비우메의 전설, 다자이후의 매화는 천년의 세월을 고결한 모습과 그윽한 향기로 지키며 또 한 해 텐만구의 화창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
 
 ■에필로그

 스가와라와 동시대의 신라에도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출중한 인물이 있었다.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일찍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으로 유학하여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당 나라의 관직에 있다가 신라로 귀국했지만 최치원에게 시대적 운이 따르지 못했음일까. 국운의 쇠퇴와 골품제도의 한계로 인해 정치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최치원을 생각하면 너무나 애석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던 해인사, 합천군을 대표하는 꽃도 매화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