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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太宰府)의 매화 〈중〉
다자이후(太宰府)의 매화 〈중〉
  • 의사신문
  • 승인 2018.02.0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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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69〉

■매화, 후리소데(振袖)의 꽃들
본전의 앞마당에 두 그루 매화나무(홍매화, 백매화)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다. 우측의 백매화가 잘 알려진 전설의 `토비우메(飛梅)'이다. 간코(管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별칭)가 떠난 후, 주인을 그리워하던 본가의 매화나무가 다자이후로 날아와 하룻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한다. 누군가는 본가에 남겨져 외롭게 죽은 부인의 혼령이 찾아와 그리움을 새긴 나무라 하지만, 아마도 스가와라가 죽은 후 그를 추앙하던 사람이 이곳에 심은 매화나무일 것이다. 이후 토비우메는 이들의 신목(神木)이 되어 10대를 이어오면서, 본전의 앞뜰에 연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자이후 텐만구 경내에는 200여 종, 6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곳의 매화는 다른 지역보다 먼저 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토비우메가 제일 먼저 망울이 맺고 꽃이 핀다고 한다. 매년 2∼3월에는 텐만구 경내 전체에 매화가 만발해 멀리서 보면 뽀얀 안개가 낮게 드리운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토비우메의 전설은 스가와라의 사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매화라는 상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숭앙(崇仰)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본궁의 매점에는, 소원을 써서 신궁에 봉납하는 오각형의 작은 에마(나무액자, 繪馬)와 오후다(符籍)를 사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줄 지어 서 있다. 상점 앞에 세워진 푯말이나 처마 밑의 흰 슬로건(slogan)에 쓰인 글씨처럼 참배객의 주된 이슈는 학업성취와 수험합격이다. 또한 거기에는 100엔을 넣고 오미쿠지(점괘) 쪽지를 뽑는 철제 상자도 있다. 오미쿠지 운세가 좋지 않으면 그곳의 나무 아래 걸린 줄에 묶어 놓고 가면 액운이 물러간다나?

다자이후 텐만구는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기에 재건립 되었다. 편백나무 껍질을 이어 붙인 크고 웅장한 지붕은 초록의 이끼가 군데군데 서려 있을  정도로 고색창연하다. 텐만구의 장엄한 건축 양식은 다이묘(大名, 지방 군주)와 사무라이(侍, 무사)가 중심이 된 모모야마(桃山時代, 1568∼1615) 문화의 특성을 보여 준다.

본전 입구를 들어서니 상판을 비롯해 건물 내부의 통로까지, 바닥부터 천정, 처마 밑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다섯 꽃잎의 황금빛 매화 문양이 장식품처럼 붙어 있다. 다시 한 번 신궁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다. 세이덴(正殿)의 정면 벽에는 커다란 4개의 매화 문양이 늘어서 근엄하고 경건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 중심의 제단에 놓인 둥근 거울, 거울 아래 신관(神官)이 참배객들의 가운데에 앉아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다. 아마도 텐만구에 값 비싼 헌납을 하고 본전에 올라 온 사람들의 소망을 간코에게 축원해주고 있음이리라.

그런데 절이라면 부처상이 놓일 자리에 안치된 신궁의 거울은 또 무엇인가. 일본의 신사에서 거울의 전통적 의미는 특별하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춰 주기도 한다는 신격화된 신경(神鏡)이며 신기(神器)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비춰보며 자신을 성찰한다는 거울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인식으로는 접근할 대상이 아니다. 거울 위쪽에 칼 모양의 문양이 걸린 것은 텐만구가 신기로 거울, 칼 등을 모시고 있음을 뜻한다.

본전에 들기 전에 참배객이 손과 입을 씻는 데미즈야(手水舍) 옆에, 후리소데(振袖, 기모노의 일종)를 입은 대 여섯 살 여자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소매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후리소데의 아름다운 꽃문양, 허리를 감싸는 넓은 오비(帶)에는 나비와 꽃이 유희를 벌이고 있다. 후리소데는 꽃이 한 종류가 아니라 국화, 매화, 모란꽃 등 오색의 색감이 넘치는 작고 큰 무늬들이 어울려 화려함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철없는 아이는 기모노의 무게와 입는 예법에 지친 듯 불편하고 어색한 표정이다.

이른 봄날, 한 순간에 피었다 지는 처절한 낙화 때문일까, 후리소데에 벚꽃이 사용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가장 잘 사용 되어지는 꽃문양은 국화이고, 젊은 여인이 국화 문양이 없는 후리소데를 입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후리소데는 결혼식, 성인식, 졸업식, 신년회 등에서 미혼 여성들이 입는 예복이라 하나 모두가 그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다. 신사나 불사의 결혼식에서, 간혹 신부가 흰색의 후리소데를 입는 것은 자신의 청순무구(淸純無垢)함을 나타내고, 시집가는 가문의 가풍으로 꽃문양을 채울 것이라는 뜻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본 여인들이 입는 기모노에 새긴 꽃들은 대부분 국화, 매화, 벚꽃, 모란꽃으로 일본인들의 꽃에 대한 선호도를 보여준다. 모두가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벚꽃을 제외하면 한반도를 통해 야마토(大和) 시대의 고대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일본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상징되는 국화는 4세기경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우리의 역사 문헌에는 없으나,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유학자 왕인(王仁)이 매화를 가져와 정원에 심었다고 한다.

꽃 중의 꽃이라 불리는 모란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매화가 장강문명을 대표하는 꽃이라면, 모란은 황하문명을 상징하는 역사성을 가진 꽃이다. 매화가 불요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꽃이라면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다. 설총의 〈화왕계〉에서는 모란이 꽃의 왕으로 의인화될 정도로 신라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륙과 한반도의 문화와 문명적 영향에 자유롭지 못한 나라, 헤이안 시대의 꽃들 역시 당연한 문화적 흐름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벚꽃은 10∼11세기 헤이안 시대 후반부에서 시작해서 가마쿠라 막부 시대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주종을 이룬다. 조정의 천황과 귀족층 중심의 궁정문화에서 탈피해 사회의 주도권이 사무라이 계급으로 넘어 가면서 벚꽃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 봄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화사하게 만개하는 하얀 꽃잎들, 일본의 궁중불교가 신불습합(神佛習合)과 함께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러 민중불교로 자리 잡은 것처럼, 산야에 평범한 벚꽃이 무사와 평민들의 꽃이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까지 자생의 산벚나무(야마자쿠라, 山櫻) 일색이었던 것이, 접목기술의 발달로 인해 18세기에 들어와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 染井吉野)로 대체되었고 예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다양한 벚꽃이 일본의 문화와 예술계를 풍미(風靡)했다. 오늘날 각 지역에서 신사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벚꽃 마쓰리(祝祭)는 일본 최대의 축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큰 가치와 의미가 있었던 벚꽃이 조선에서는 왜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당했을까. 벚꽃이 화사하기는 하나 품격은 떨어진다. 우리네 선비들이 매화를 좋아한 이유는 추운 날씨에도 고결한 기개로 피는 아름다운 꽃과 은은하게 배어나는 향기 때문이다. 벚꽃의 화사한 만개와 한 순간의 처절한 낙화는 조선에서의 유학의 가치와 군자의 상징으로 어울리지 않았음일까. 일본에서는 조선과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화예술이나 전혀 다른 느낌의 미학적 감성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꽃은 집단이나 국가, 민족 사회의 삶과 문화, 생활 현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꽃이 가지는 특성과 색감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면서 예술과 문화적인 생태계를 지배하고, 때로는 주술적인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대륙의 다양한 꽃들이 일본으로 흘러가 더욱 아름다운 자태로 승화하여 그들의 독창적이고 전통적인 꽃문화가 되었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 이르는 문화적 이동의 역사, 야마토(大和), 나라(奈良), 헤이안 시대로 이어지는 대륙과의 교역의 중심에 큐슈의 다자이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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