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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풍란과 어머니<22>
나도풍란과 어머니<22>
  • 의사신문
  • 승인 2010.05.0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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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 사이에서 꽃대가 보이기 시작한지 한 달 열흘이 지난 나도풍란의 꽃. 앞으로 열흘은 더 기다려야 꽃망울이 터질 듯하다.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침상에 누우신 지 벌써 12년째입니다. 오랫동안 아버지께서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보살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보여주신 부부간의 사랑은 `서로 뭐라 말을 하지 않아도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가시고 나서는 부쩍 쇠약해지는 어머니를 집에서는 달리 보살필 방도가 없어 요양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오랜 친구가 근무하는 병원이라 마음 씀씀이가 별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얼마 전 급박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지난 2월 중순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기관지 삽관을 하고 기계호흡에 의존해 사투를 하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습니다. 하루 두 번 면회를 마치고 사무실로 내려오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150을 넘나들고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뿐입니다.

괜한 마음에 창가에 자리 잡고 있는 난을 바라보기도 하고 분무기로 물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야 겨울 내 자리에 앉을 생각이 듭니다. 다들 고만고만해서 특별히 귀하게 여기는 난은 없지만 나름 작은 이야깃거리가 하나씩은 있습니다.

큰 나도풍란은 꽃대 둘을 마치 타워크레인 올리듯 뻗고 있습니다. 이제 보름쯤 지나면 아침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맑은 향으로 지나는 이의 걸음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그 옆엔 4년 전에 데려온 작은 나도풍란이 또 한 촉 자라고 있습니다. 병원 안에 있는 찻집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그 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이파리 석장이 전부였습니다. 그 여린 녀석이 신기하게도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나도풍란의 꽃은 참 볼품 없습니다. 꽃잎이 희기는 한데 그리 깔끔한 흰색이 아니라 누른 색이 섞인 듯도 하고 푸른색이 섞인 듯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운데서 아래로 빠져 있는 혀처럼 생긴 꽃술에 보라색 점이 보입니다. 그 맑고 고운 색에 이끌려 자세히 볼 요량으로 가까이 하면 그 때 문득 머리속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의 향이 스칩니다.

꽃이 진 후 데려온 그 작은 풍란은 아직도 4년 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잎이 두 장으로 줄어 더 약해졌습니다. 지난겨울엔 그 작은 잎마저 시름시름 주름이 생겨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눈 내리던 봄날 어머니 면회를 마치고 내려와 문득 보니 잎에 주름이 없어지고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생명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닌 것이라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뿌리를 싸고 있는 이끼가 마르기 전에 물을 적셔주고 혹 새잎이 나고 있는지 살피고 또 살펴봅니다. 아직 새 뿌리가 돋지는 않았지만 곧 보이겠지요.

이젠 어머니도 중환자실에서 나온 지 여러 날 지났습니다. 더 자주 눈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더 지금처럼 있더라도 `여기까지'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기 누워계신 어머니만 할까요. 미물이 나를 가르칩니다. 그냥 바라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누워계신 어머니도 그러하실까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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