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7:52 (목)
오백 원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
오백 원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
  • 의사신문
  • 승인 2018.01.08 14: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78〉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현대사회에서 재물의 가치는 날로 커지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한 지금 돈은 좋은 물건이고 부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작년에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이스라엘 유발 하라리 교수의 역저 〈사피엔스〉를 보면 화폐는 물물교환을 하던 원시사회에서 경제가 커짐에 따라 생긴 복잡한 문제점을 단숨에 해결한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삶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를 충족시키기 위해 경제적 진화를 거듭한 결과 보편적 가치와 전환성(轉換性)을 가진 화폐 즉 돈이 생겼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돈이 많으면 더 좋은 의식주를 갖출 수 있다. 멋있는 옷, 맛있는 음식, 크고 화려한 주택이, 평범한 의상, 조야한 식품, 작고 초라한 집 보다 비싼 것이다. 같은 속성의 물건을 비교할 때는 서로 합의를 이루는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용도의 물건을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이견이 생길 수 이다. 예를 들면 옷과 음식을 비교할 때 생길 수 있는 비객관적인 가격 차이이다. 더욱이 형이상학적인 무형의 내용을 돈으로 평가할 경우에 아주 심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아니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여기 내 경험담을 하나 소개한다.

20여 년 전 여름, 국제 회의에 참석차 인도 뉴델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인도를 처음 방문하는 나는 이 곳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동료에게 주의사항을 듣고 긴장하였다. 회의를 하는 호텔은 의외로 시설이 훌륭했으나 비싸서 하루에 250 불이나 하였다. 호텔 밖은 밤이 되면 길가에서 담요를 덮고 누워 자는 사람으로 가득하였다. 호텔 문을 총을 든 군인 차림의 수위 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다. 회의가 없는 한가한 토요일, 혼자 호텔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 식당에서 50불짜리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마침 같이 참석한 필리핀 동료 셋을 따라 시내 구경을 하게 되었다. 막 호텔 문을 나서는 순간 필리핀 친구 구두위로 새똥이 떨어졌다. 그 때 어디선가 구두닦이 청년이 나타나 새똥을 없애겠냐고 물어봤다. 필리핀 친구는 얼떨결에 허락하였고 몇 번의 손질로 구두는 다시 깨끗해졌다. 가격이 300불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의 말에 우리 넷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끈질긴 구두닦이의 억지에 협상하여 30불을 주고 해결하였다. 소위 바가지를 쓴 것이다.

우리는 마치 시가전에 나선 병사 모양으로 더욱 긴장되어 거리를 살피며 걸어갔다. 길거리에 자판으로 만든 노점 책가게를 지나가게 되었다. 필리핀 친구들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반색을 하며 좋은 책을 찾았다고 소리쳤다. 베스트셀러라면서 선물로 열 권씩 사는 이들의 왕성한 구매 행위에 나도 덩달아 우리 돈으로 500원을 주고 한 권을 구입하였다.

책의 내용은 인도의 사상가가 쓴 `인생을 잘사는 법' 종류의 소책자였다. 물론 저작료를 지불하지 않은 해적판으로 오백 원에 걸맞게 누런 재생용지에 인쇄도 어설펐다. 호텔로 돌아와 시큰둥하게 책을 읽던 나는 한 단락에서 눈길을 멈췄다. 삶의 지혜 중 하나로 “만나는 사람마다 꽃을 주어라.”는 항목이었다. 꽃이 없으면 다른 선물을 주고 마땅한 선물이 없으면 좋은 말과 마음 이라도 주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다른 사람에게 꽃을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선물도 주로 받기만 했다. 내성적인 나는 내 업무를 처리 하기에 급급하였지 여유 있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충고를 해 준 경우가 적었다. 아마도 저자도 역순으로 꽃보다는 선물을, 선물보다는 마음을 주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즉, 물질보다도 정신적, 감성적 관심을!

아무튼 이 글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실행에 옮기도록 노력하였다. 물론 꽃을 준 적은 몇 번 안되지만 만나는 사람을 생각해 가능한 선물을 준비하고는 하였다. 마침 내가 수필집을 몇 권 발간하여 동료와 친지 분에게 선물로 적당하였다. 대학병원의 역사문화원장이 되어서는 우리가 출판한 의학 역사책도 좋은 품목이 되었다. 또, 내 방 탁자에는 방문객을 위하여 과자와 사탕을 항상 준비하여 놓았다.

한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도움이 되는 말과 마음을 주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되었다. 점차 다른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고 도와주는 것 같았다. 만날 때 마다 무엇인가 주려는 사람에게 당연히 호감이 생기지 않겠는가? 덕분인지 나는 능력에 비하여 과분하게 인정 받고 잘 지내오고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본다. 그때 오백 원으로 구입한 책이 나에게 되돌려 준 가격은 얼마나 될까? 구두 청소의 1/60, 샌드위치의 1/100, 호텔 1박의 1/500의 돈으로 구매했지만, 내 인생에서 헤아릴 수 없는 크나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간 존중과 배려의 효과를 잘 알고 있는 인도의 현인(賢人)은 그런 생활태도를 유도하고 강조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꽃을 주어라.”라고 쉽사리 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먼저 했던 것이다.

나는 이번 경험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실감하였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