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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무술년 신년특집 기념수필 - 베짱이의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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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8.01.0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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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교육 후 그 뿌듯함…`진짜 의사'가 된 기분 

12월 돼서야 연수교육 수강 게으름 피운 부끄러움 밀려와
가짜 대학생에 속았던 회상 속에 다양한 강의에 매료돼

김애양 은혜산부인과 원장(의사 수필가)

지난 일요일에 연수교육을 받으러 갔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 이르러야 연수 평점을 하나도 취득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개원의는 일 년에 8점 이상을 받아야 의사면허자격증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를 알면서도 안일하게 대처했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출근하는 날보다도 일찍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휴일인데 어딜 바삐 가느냐고 물었다. 보수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대답이 그에겐 의외였던지 “의사들은 평생 공부를 하는군요.”라고 감탄이 섞인 응대를 했다. 그의 말처럼 평생 공부를 해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환자에게 더 나은 진료를 할 텐데 베짱이처럼 게으름을 피운 나는 가짜 의사인가 싶어 부끄럼이 몰려왔다.

연수 교육 장소는 의과대학 대강당이었다. 의사란 직업이 늘 환자에게 설명을 하면서 가르치고 지시하는 일에 익숙해져서인지 강의실에 앉는 느낌이 새로웠다. 그래서인지 기억은 나를 40년 전 대학교 1학년 시절로 몰고 갔다.

대학에 갓 입학을 했을 때였다. 친구라곤 고등학교 동창 한 명 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첫 미팅을 다녀오더니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상대방 남학생에게 홀딱 반했다는 것이다. 훤칠한 키, 조각 같은 얼굴에다 버버리 코트를 입은 모습이 귀공자처럼 보일 뿐 아니라 S대 법대를 다니고 부모님도 두 분 다 대학교수라니 더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입시를 앞두고 오빠 친구에게 잠깐 과외공부를 했는데 한 번은 과외선생님이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라며 버버리코트 입은 남학생을 데려온 적이 있었다. 나도 한 눈에 그 버버리남자에게 끌렸다. 과외선생님과 내가 수학문제를 열심히 푸는 동안 그는 책상 옆에 가만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길고 하얀 그의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기타도 잘 친다는 말이 사실인 듯 했다.

내 친구는 버버리코트 남학생에게 또 만나잔 얘기도 못 들었고 연락처도 모른다며 상심이 컸다.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저러다간 상사병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하며 그 버버리코트의 학교로 찾아가 보자고 부추겼다.

그땐 S대가 얼마나 멀던지 버스를 타고 끝도 없이 달려갔다. 그 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데에는 심리적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남학생의 이름 하나만 알고 학교로 찾아가는 우리 둘이 정상이 아닌 건 사실이었다. 바바리남자와 마주친다면 우연인 듯 연기를 하겠지만 혹시 자신에게 홀딱 반해 두 여자가 먼 길을 찾아온 것을 알아채면 어쩌나 하는 우려로 그만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자꾸 뒤에서 우리를 잡아끄는 것이었다.

S대에 도착해보니 그 광활함이 우리를 또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3월의 매운바람을 맞으며 정문에서부터 하염없이 걸어 법과대학에 다다랐다. 가는 도중에 혹시 버버리 코트를 입은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는 것도 에너지를 소진케 하는데 기여했다. 그와 마주치는 행운은 뒤따라 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법과대학 사무실까지 돌진해야 했다.

아주 중요하고도 다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남학생 이름을 또렷이 대면서 그의 수업시간을 알려달라고 했다. 다행히 사무직원이 언니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어 부탁하기가 퍽 쉬었는데 그녀는 한참이나 서류를 뒤적이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그런 재학생이라곤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당황해하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렇게 가짜로 판명 나는 대학생이 적잖이 있다면서 혹시 무슨 피해라도 입은 것은 없는지 물어왔다. 피해? 피해라고? 두 여대생이 관악산 골짜기까지 찾아와 유령학생을 찾는 경험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겪어서는 안 되는 엄청난 정신적 피해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오는 내내 오죽하면 가짜 대학생 노릇을 해야 했을까 바바리코트 남자에게 동정심과 연민을 갖는 대화를 나눔으로써 우리가 감쪽같이 속은 사실을 감추려고 애썼다. 정말이지 가짜대학생인 그가 진짜대학생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졌는데….

나중에 과외선생을 통해 그 가짜 대학생이 정신병원에 치료받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병명은 과대망상증이라던가?

대학 시절 회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연수교육 강사가 열띤 음성으로 항생제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려주자 생각은 곧 강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연수 교육은 서울특별시의사회에서 주최하는 만큼 개원가에 유용한 정보를 많이 주었다. 수면장애나 고혈압, 골다공증 등 진료실에서 자주 접하는 질병에서부터 `의사의 화병 다스리기'처럼 재미있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의가 펼쳐졌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교육을 받다보니 문을 들어설 때와는 달리 더는 가짜의사가 아닌 듯 뿌듯해졌다. 새해엔 연수교육도 충실히 받고 의협신축건물 회비와 같은 기금납부도 솔선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의사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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