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2:01 (금)
세월, 피부로 쌓이다
세월, 피부로 쌓이다
  • 의사신문
  • 승인 2017.11.20 13: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늙음 오디세이아 〈11〉

아니다, 호화로웠던 궁궐
이미 한 조각 폐허로 변했고
천 년의 애환과 이합(離合)
한 가닥 자취조차 찾을 길 없으니
살아 있는 자들이여 잘 사시오
바라지 마오, 지상에 기억 남기를

- (`자오허(交河, 교하)옛 성터' 아이칭(艾靑, 애청)/류성준 역)

유 형 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 시인·수필가

자오허성은 투루판에 있는 고대 중국의 고성이다. `서유기'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투루판은 실크로드의 중요거점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고 풍화되어 유적, 아니 잔해로만 남아있는 자오허성의 옛 영화는 애오라지 `세계문화유산등재'라는 증명으로만 세워져 있다.

굳이 다른 나라의 성을 생각지 않아도 주변의 허물어져 가는 크고 작은 성들은 어렵지 않게 덧없는 세월을 생각게 한다. 마오쩌둥시절 창작 활동을 금지당하고 홍위병들에 의해 원고를 강제 몰수당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했던 중국의 대표적 시인 아이칭은 쌓였다가 허물어져 가는 성의 세월, 세월의 성을 시로 읊었다.

쌓이고 스러지기는 인간의 육신을 겉 싼 채 쌓였다가 벗겨져 떨어지는 피부도 마찬가지다. 인생 20년이면 그 사람 심성(心性)의 절반이, 40년이면 전부가 살갗에 드러난다고 한다. 험하게 세월 살이 한 이는 피부도 거칠고, 편한 세월 보낸 이는 피부가 곱다.

피부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표피층과 진피층으로 나뉘어 쌓여 표피가 벗겨지면 진피가 새로운 표피로 돋아나고 안쪽에는 새로운 진피가 생긴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는 세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세월도 피부도 돋아나고 돋아나서 성처럼 쌓인다.

코펜하겐서 2시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북부해안에 모래만이 펼쳐있는 회색 빛 발틱 해변을 따라 얼어버린 바다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쌓여 있었다.

떨어져 홀로 있음에/그렇게 옹색함이여/지금 그대로 이리로 나서라//얼어버린 발틱의 옷자락에서/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라/세월은 흘러 가는 게 아니라/쌓이는 거라고/쌓이어 굳는 거라고/세월은 두께로 쌓일 뿐이라고/숨 모아 외치라//그 소리 머언 바다 돌아/안개도/그대 조각을 거두어 보라고/무리져 오면/숨 안 맴도는 발틱 내음 되 내며/빈 손 빈 외투에 담아 돌아설지라도 - (1986년, 발틱 해안에서)

삼십 년 넘은 일이다. 쫓기듯 허기진 해외 연수생의 심사로는 `세월은 흐른다'는 도도하고도 여유 있는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손수 끼니를 해결하느라고 거칠어지는 손등을 대하는 깡마른 저녁마다 세월은 거칠게 성처럼 쌓이기만 했다.

우리 또래의 누구에게든 어깨나 팔뚝에 우두 맞은 자국이 있을 게다. 어릴 적에 눈송이 모양 같다며 누구 것이 더 큰가 대보며 자랑하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그러던 자국들이 수십 년을 지나면서 옅어져 간다. 깊은 상처, 진한 상처일수록 오래 간다. 오래 지나야 아문다. 깊게 박힌 사연들은 세월 속에 추억이나 과거로 오래 남는다. 어떤 이들은 피부에 새기는 것은 쉬이 잊혀져 섭섭할까 봐 가슴에 또는 뇌리에 새기기도 한다. 그 밖의 자잘한 일들은 떨어져 나간 살갗마냥 거의 흔적도 없이 잊혀져 버린다.

늙어감에 따라 피부도 늙어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늙는 것도 병인 양 노화방지에 관한 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속에서부터 치밀어 드러나 쌓여가는 세월의 징표를 관리하여 시간을 되물리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떨어져 쌓인 낙엽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매월당 김시습의 〈낙엽〉 한 대목쯤은 접해본 성지기의 마음으로 피부를 가꾼다는 뜻이라 여겨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는다.

落葉不可掃(낙엽불가소)  떨어진 나뭇잎 쓸어내지 마오
偏宜淸夜聞(편의청야문)  맑은 밤 그 소리 듣기 좋으니.
風來聲慽慽(풍래성척척)  바람 불면 소리 우수수
月上影紛紛(월상영분분)  달 떠오르면 그림자 분분.
鼓窓驚客夢(고창경객몽)  창 두드려 나그네 꿈 깨우고
疊?沒苔紋(첩체몰태문)  섬돌에 쌓여 이끼 무늬도 덮으니.
帶雨情無奈(대우정무내)  비에 젖은 정을 어이할거나
空山瘦十分(공산수십분)  텅 빈 산 너무 야위어.


수백 수천 년 지내온 성들에 고작 몇 십 년 남짓으로 어찌 일설(一說)을 보탤 수 있으랴. 아이칭의 시구마냥 `지상에 기억 남기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것의 피부로 쌓여 있기를' 위해 지난해보다 깊어진 주름살이 세월을 드러냄을 담담히 쳐다볼 뿐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